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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진의 Hollywood Interview]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무대위에 올려진 가장 위대한 뮤지컬

2022-04-01 (금) 글 박흥진 한국일보 편집위원 / 할리웃 외신 기자 협회(HFPA)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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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박흥진의  Hollywood Interview]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무대위에 올려진 가장 위대한 뮤지컬
스티븐 스필버그(75)의 뮤지컬‘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가 최근 열린 산타 바바라 영화제에 초청을 받아 상영됐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현대판인 이 영화는 1961년에 개봉돼 작품과 감독과 남녀 조연상 등 아카데미상을 10개나 탄 동명 뮤지컬(음악은 레너드 번스타인이 작곡)의 리메이크다. 그러나 스필버그는 원작보다 인물들의 특성을 보다 충실하게 보충하고 분위기도 원작보다 실감나게 사실적으로 묘사, 영화를 자기 나름대로 재해석했다. 스필버그의 영화는 3월 27일에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과 감독 및 여자조연상 등 모두 7개 부문에서 수상 후보에 올라 여자조연상을 탔다. 영화는 비평가들의 극찬을 받았으나 흥행에선 실패했다. 다음은 영화상영 후 동영상으로 있은 스필버그와의 일문일답 내용.
[박흥진의  Hollywood Interview]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무대위에 올려진 가장 위대한 뮤지컬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포스터.


-이 영화는 50여년을 영화감독으로 일해 온 당신의 첫 뮤지컬인데 뮤지컬을 만들기로 한 동기가 무엇인가.

“나는 과거 뮤지컬을 만든 적이 없었지만 항상 그 것을 만들고 싶었다. 과거의 인터뷰 때마다 언제나 하고 싶었지만 못 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난 제일 먼저 뮤지컬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가끔 서부영화라고도 대답했다. 그러나 언제나 만들고 싶었던 것은 뮤지컬로 나는 뮤지컬의 형식을 좋아한다. 나는 할리우드가 만든 뮤지컬을 다 봤는데 영화가 나오면 선착순위 1위로 극장엘 찾아가 보곤 했다. 나는 뮤지컬에 나오는 배우들의 다양한 재주와 능력을 좋아한다. 한 사람이 세 가지를 다 잘 할 줄 알아야 한다. 제일 먼저가 연기요 다음이 춤이며 그리고 노래도 부를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난 지금까지 배우들이 춤추고 노래 부르는 영화를 만들지 못했다. 어쩌다 내가 만든‘1941’과‘레디 플레어 원’과 같은 영화에 잠깐 춤추는 장면이 있기는 했지만. 그러고 보니 내가 아내(케이트 캡쇼 출연)를 만난 ‘인디애나 존스 앤드 더 템플 오브 둠’도 춤추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따라서 뮤지컬은 저기 수평선 위에서 내가 찾아와 주기를 가다리고 있었던 셈이다.”
-재해석이긴 하지만 왜 뮤지컬을 만들면서 이미 만들어진 영화를 다시 만들기로 했는가. 왜 새 소재를 바탕으로 한 작품을 만들지 않았는지.

“나는 언제나 내가 10살 때 처음 들은 뮤지컬에 대한 정열을 지니고 있었다. 그 때 내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 영화의 원조인 1957년에 브로드웨이서 공연된 뮤지컬을 실제로 녹음한 음반을 사와 들은 것이 내가 처음 들은 뮤지컬이다. 난 그 음반을 들은 지 2주 후에 뮤지컬에 나오는 모든 노래들을 외웠다. 그 후로 이 뮤지컬은 늘 나와 함께 있은 셈이다. 그리고 새로 제작된 뮤지컬들을 몇 편 봤다. 그러다 1961년에 로버트 와이즈와 제롬 로빈스가 공동으로 감독한 영화를 보고 위대한 걸작이라고 생각했다. 그 영화야말로 스크린에 옮겨진 가장 훌륭한 뮤지컬 중의 하나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60년이 지났고 그 뮤지컬은 수천 번 공연되었지만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내게 있어선 무대 위에 올려 진 가장 위대한 뮤지컬이다. 이 뮤지컬에 버금가는 것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이 최초의 미국 오페라인 ‘포기와 베스’다. 따라서 내가 내 첫 뮤지컬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선택한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힘들었던 것은 사람들에게 내가 미치지 않았다는 것을 설득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를 후원한 사람들도 많지 않았다. 내 후원자들로는 내 아내 케이트와 제작자 크리스티 마코스코 크리거와 각본을 쓴 토니 쿠쉬너 등 극 소수다. 후원자가 많지 않았다는 것이 내겐 적어도 이 작품을 재해석하려는 용기를 준 셈이다.”
-1961년 영화에선 푸에르토 리칸인 주인공 마리아로 백인배우 나탈리 우드를 기용했지만 당신 영화에선 라틴계 인물들을 모두 실제로 라틴계인 배우들을 기용해 배역했다. 그런 결정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는가.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만들려면 반드시 그래야 한다고 맨 처음부터 결정했다. 미국 백인 배우를 기용할 생각이 전연 없었다. 그러나 나는 1960년대에 저질러 진 문화적 잘못이나 착오를 시정하자는 것은 아니었다. 그 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니다. 나는 1960년대에 있었던 일에 대해 아무 책임도 없으며 또 그 같은 결정을 비판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 와서 라틴계 배우들을 쓰지 않고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만든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 것은 필수 조건이다. 푸에르토 리칸 갱 ‘샤크스’의 우두머리인 베르나르도와 그의 연인 아니타 그리고 마리아와 ‘샤크스’의 단원 역을 맡자면 반드시 부모 중 한 사람이라도 라틴계여야 한다고 결정했다. 처음부터 그 것이 가장 중요한 사항이었다.”

-마리아 역의 레이첼 제글러와 아니타 역의 아리아나 드보스(아카데미상 조연상 수상)를 비롯해 라틴계 배우들에게 영화의 중요성을 알려주기 위해 영화와 관계없는 사람들까지도 초청해 설명해 주었다고 하는데.

“3개월의 리허설을 통해서였다. 많은 시간을 할애해 그들 모두에게 왜 이 영화가 특히 오늘날에 와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지를 주지시키려고 했다. 이 영화의 얘기는 60년 전보다 요즘 시의에 더 맞는 것이다. 시대 변화와 함께 외국인 혐오증이 기승을 떨고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사람들 간의 증오와 분노가 세상을 가득히 메우고 있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사랑과 증오의 얘기의 결정판이다. 그 것은 사랑이 어떻게 해서 모든 분열을 정복할 수 있는가를 얘기하고 있다. 그래서 배우들은 이를 연기하기 전에 그에 대해 서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이 같은 목적을 위해 우리는 영화의 무대로 과거 푸에르토 리칸들의 거주지였던 산 완 힐에 살던 여러 사람들을 초청했다. 산 완 힐은 1950년대 재개발돼 현재 링컨 공연센터가 자리하고 있다. 우리는 과거 이 지역에 살았던 경찰과 어머니와 아버지들 그리고 이들의 아들과 딸들을 초청해 과거 그들이 살던 때의 얘기를 들었다. 푸에르토 리칸들은 하루 끼니를 때우기 위해 종일 일을 해야 했고 자신들이 백인이 아니어서 수많은 불편과 부당함을 겪어야 했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일종의 사회학 강의였다. 그리고 원작에서 아니타 역을 했던 푸에르토 리타에서 출생한 리타 모레노(아카데미 조연 상 수상)를 초청해 강연을 들었다. 내 영화에서 모레노가 맡은 발렌티나 역은 특별히 모레노를 위해 만든 것이다.”

-이 영화를 만드는 것처럼 즐거운 일도 없었다면서 세트에서 노래까지 불렀다고 들었는데 다른 영화 만들 때도 그랬는지.

“난 기분이 좋으면 노래를 부른다. 결코 노래를 잘 불러서가 아니다. 그리고 세트를 돌면서 펄쩍 펄쩍 뛰기도 한다. 마치 노래를 부를 줄 알고 춤을 출 줄 안다는 식으로. 그런 나를 보고 배우들과 제작진들은 비웃지도 않았다. 우린 모두 노래와 춤과 음악과 연기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면서 혼연일체가 되었는데 이 영화야말로 내가 만든 영화들 중에서 가장 즐기면서 만든 것 중의 하나이다. 이렇게 즐거운 마음으로 만든 또 다른 영화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E.T.’다. 우스운 것은 ’라이언‘은 폭력적인데도 세트에 창조적 에너지가 가득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E.T.’의 세트는 호젓한 분위기에 젖어 있었지만 모두가 친밀하고 가까웠다. 이 세 영화가 내 생애에 있어 가장 즐거운 경험으로 언뜻 기억되는 것들이다.”

-앞으로 뮤지컬을 더 만들 생각인지.

“결코 ‘아니다’라는 말을 하지 말라는 말도 있기는 하지만 다른 뮤지컬을 만들 계획은 없다. 그저 모든 사람들이 이 영화에 바친 공로에 감사할 뿐이다. 난 내 작품에 대해 행복감을 느낀다. 그리고 원작을 변형시켜 그 내용을 보다 깊게 만들고 또 요즘 시의에 맞도록 각본을 쓴 토니 쿠쉬너를 사랑한다. 앞으로 매우 오래 동안 감독으로서 뮤지컬을 만들 일은 없을 것이다. 그보다는 서부영화를 찾아야겠다. 지금 찾기 시작해야겠다.”

<글 박흥진 한국일보 편집위원 / 할리웃 외신 기자 협회(HFPA)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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