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18시간의 고된 산행 끝 맛보는 달콤함

2022-03-04 (금) 정진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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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행기 (2) Rabbit & Villager Peak

18시간의 고된 산행 끝 맛보는 달콤함
18시간의 고된 산행 끝 맛보는 달콤함


평소보다 많이 지닌 물과 음식물의 무게가 짐짓 어깨를 짓누른다. 트랙킹폴과 카메라를 든 장갑 낀 손으로 수건을 꺼내 이마와 콧등에 흐르는 땀을 수시로 닦아내자니 바쁘고도 불편하다. 어느 한 대원이 ‘아이스크림 생각이 간절하다’며 말문을 연다. 너도 나도 이 말을 받아 떠들썩하게 작은 소망들을 토로하며, 각자가 상상으로나마 당면한 더위와 갈증을 달래보는 표정들이다.

바로 눈앞에 우뚝 솟아있는 주봉의 산괴를 바라보자면 그 돌올외연함에 위압감을 느끼게 되는데, 반대로 이따금 모든 대원이 걸음을 멈추고 휴식을 취할 경우에, 눈 아래 펼쳐지는 Salton Sea의 연푸른 물빛과, 선연한 골격을 그대로 다 드러낸 산줄기들을 한눈에 바라 보노라면, ‘아, 어느 덧 이렇게 많이 올라왔구나’는 성취감에 다시금 용기가 솟아난다.


이러 구러 5000’내외의 고도에 이르른다. 고도가 높아지니 햇볕이 쨍쨍한 한 낮이 다 되어가는시각인데도 더위가 한결 누그러진 것 같다. 간간이 시원한 미풍이 살랑 살랑 불어와 얼굴에 배인 땀과 몸에 담긴 후끈한 열기를 새록 새록 가셔주니 적잖이 상쾌한 기분이 된다.

8마일지점에 이르고, 어느 덧 시장끼가 느껴질 즈음(12:40)에, 맨 윗쪽 저 만큼 멀리로 불그스럼하면서 변화무쌍한 형태를 지닌 아름다운 암석지대가 눈에 들어온다. 마치 하나의 멋진 성채를 연상시키는 화려한 바위군에 몇 그루의 Pinyon Pine이 곁들여져 그야말로 군계일학의 준수한 경관을 드러낸다. 금상첨화란 말도 떠올려질 만큼 바위와 솔의 어우러짐이 과연 아름답다.

건조한 사막에서 해매다가 푸르른 오아시스를 만난 기분이랄까, 아니면 하늘나라 선녀들이 하계의 호수와 사막의 조화미를 완상하는 쉼터로 정해 놓은 곳이 바로 여기가 아닐까 싶게 신령한 기운이 감도는 듯 하다. 바로 앞에서 걷는 제이슨을 불러세워 이 풍치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준다. 또 나도 한 장 찍어달라며 카메라를 건넨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곳을 지나며 위로 오를수록 더욱 수려한 자태의 암석군이 나타난다. 거대한 거북의 형상을 한 바위들이 있고, 누운 채로 가슴에 개구리를 올려놓고 희롱하는, 어쩌면 신화속의 Titan일지도 모를, 거인의 머리와 상반신인 바위들도 있다.

마법의 나라, 신화의 세계에 들어온 것은 아닌가 황홀한 신비감이 든다. 일곱시간 가까이 부단히, 거친 사막을 건너고 가파른 산줄기를 땀흘려 오른 우리 특공대원들만이 볼 수 있는 비장의 신비경이겠다. Rabbit Peak을 오르는 다른 루트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별천지의 경관이다. 이 Rabbit Peak 주봉의 상부를 멀리 동쪽에서 볼 때, 2개의 돌출부위가 두드러져 보였는데, 지금 이 바위군들이 그 앞쪽의 돌출부에 해당할 듯 하다.

다시 이 구간을 벗어나니 곧바로 아마도 2번째의 돌출부에 해당될 듯한 암봉 아래에 이르른다(13:00; 8.4 마일; 5500’). 정상까지는 아직은 1100’ 이상의 고도를 남겨놓은 이곳 바위옆 Pinyon Pine 그늘에서 점심을 먹기로 하여 각기 자리를 잡고 앉는다. 아래로 펼쳐진 환상적인 경관을 보며 아내가 넣어준 부드러운 떡으로 선계에서의 망중한의 점심을 즐긴다.

20여분에 걸친 점심겸 휴식을 마치고 다시 정면에 솟아있는 돌출 암봉을 향해 발길을 옮긴다. 10분 내외를 오르니, 2번째 돌출암봉(Pinnacle)의 Class 2 Slabs에 다다른다. 통과하기가 쉽지 않은 암릉구간으로 왼쪽면은 거의 절벽수준이라, 오른쪽(북쪽)면에서, 제이슨과 써니가 선두에 서서, 통과가능한 루트를 찾아 앞으로 나아간다. 가파른 바위벽도 오르내리고, 또 더러는 우거지고 쓰러진 나무들을 헤치고 넘으며 이 구간을 통과한다(13:37; 6000’). 10인의 대원들이 모두 조심 조심 안전하게 나아가느라 거리에 비해 시간이 많이 걸린다.


이 Pinnacle구간을 지나고 능선을 따라 조금 더 고도를 올라가니, 이제는 능선의 경사가 아주 완만하다. 마침내 가파른 경사구간이 다 지나고 이제는 걷기에 편안한 Pinyon Pine의 향기로운 숲속을 지난다. 9마일여에 걸친 힘든 시련의 여정을 잘 마친 우리들을 이제 기꺼이 용납하고 환영해주는 의미에서, 꽤 길게 깔아놓은 녹색의 카펫구간이라 상상해 본다.

9.65마일에, 제이슨이, USGS지도에서의 Rabbit Peak 정상이라고 알려주는 바위를 지난다(15:07; 6623’). 빨간 등록부 캔이 비치되어있는 것을 확인만하고 서둘러 일행을 뒤 따른다. 우리 Sierra Club이 인정하는 정상은 아직 서쪽으로 더 가야한다.

선두 대원들이 발하는 ‘와!’ 하는 함성이 들린다. 드디어 우리의 1차 목표봉인 Rabbit Peak(6640’)에 도착한 것이다(15:12; 9.85마일; 7032’ Gain). 거의 동시에 대원 모두 나름대로의 성취감을 담아 탄성을 올리며, 어쩌면 토끼의 형상이 아닌가 싶은, 정상의 큰바위에 올라선다. 드디어 사납기 그지없는 Tyranolepus Rex의 두 귀를 야무지게 움켜 잡고, 우리들 모두 각자가 손오공의 ‘긴고아’를 이 괴력의 Big Bunny 머리통에 덮어 씌운 자랑스런 삼장법사쯤이 된 셈이다.

그 간의 피로를 다 잊은 듯 너나 없이 모두 생기발랄한 얼굴들이다. 한 걸음 한 걸음 10시간에 걸쳐 한껏 응축시켰던 인고의 에너지를 정상바위에 올라 일거에 쏟아내는 감격과 환희의 순간을 카메라에 담는다. 이 산에 Rabbit Peak이란 이름이 부여된 것은 이 지역 토착민들의 전설에서 비롯되었다 한다. 이곳에는 흰 점과 붉은 점이 박힌 ‘Suic’이란 토끼가 살고 있어서, 이 토끼가 출현할 적에는 산이 흔들리며 우르릉 거리는 소리가 난다는 내용의 구전이었다는데, 아마도 우리 남가주에 능히 있을 수 있었던 지진활동과 관련된 전설이었나 보다.

20분 내외의 길지 않은 휴식을 마치고, 다시 행장을 수습하고 하산에 나선다(15:33). 하산이긴 하지만 이런 저런 여러 봉우리들을 오르고 내려야 하므로, 순등산고도도 약 1100’가 넘는 11마일의 여정이 남아있고, 대부분의 시간을 어둠속에서 조그만 헤드램프의 불빛에 의지하여 거친 길을 가야하는 것이다. 다행이라면 이제부턴 어쨌거나 대부분의 구간에 안심하고 따라 갈 수 있는 Use Trail이 있고 또 여러 차례 왕래한 바 있는 낯설지 않은 지형이라는 점이다.

오른쪽으로 펼쳐져 있는 꽤 광대한 Clark Dry Lake이 석양을 받아 황홀한 경관을 연출한다. 한 눈에 왼쪽의 Salton Sea, 오른쪽의 Clark Dry Lake을 동시에 전망할 수 있어 역시 또 경이롭다. 왼쪽의 물이 담긴 호수를 ‘음(陰)’으로 본다면, 오른쪽의 물없이 마른 사막은 응당 ‘양(陽)’이랄 수 있겠다. 이 같은 광막한 사막지역의 대자연에서도 ‘음양의 조화’를 볼 수 있음이 신기하다. 그런데 이 물이 담긴 ‘음’의 호수는 ‘상전벽해’란 말의 전형적인 사례가 된다. 즉, 이곳은 810마일에 걸친 지진대인 San Andrea Fault의 남쪽 끝으로, 1700년 이래로는 건조한 상태의 사막이었다는데, 1905년경에 범람하는 콜로라도 강물의 유입으로 형성된 가주 최대의 호수(15x35마일)라고 한다. 아마도 수백년을 주기로 ‘음’과 ‘양’이 순환되어지는 그런 지구별의 역동성을 보여주는 아주 특별한 지대가 아닌가 싶다.

약 4마일거리의 Villager Peak을 향하여 5개쯤의 봉우리를 부지런히 오르내리는 과정에, 바로 오늘 오전에 우리가 올랐던 Rabbit Peak의 동쪽 능선을 먼 거리에서 바라보니, 경사가 과연 급하다. 헤드램프로 불을 밝힌 깜깜한 시각에 Villager Peak(5756’)에 올라선다(18:20; 14.1마일; 8182’ Gain). 바쁜 몸짓으로 그러나 그래도 다들 활짝 웃으며 정상사진을 찍고 다시 하산길에 오른다. 예전에 토착민들이 이 산줄기의 동쪽 언저리에 촌락을 이루어 거주했었던 일에서 ‘Villager’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아직도 어둠속에 7마일을 더 가야하는 여정이 남아있다. 오른쪽의 Clark Dry Lake 쪽은 아스라한 절벽의 형세로 함몰된 구간이 많아, 능선의 오른쪽으로 붙어가되 너무 바짝 붙거나 몸의 균형을 잃지 않도록 십분 경계하며 발을 딛어야 하므로 아무래도 걸음이 조심스럽고 더디다. 들쑥 날쑥 크고 작은 돌과 바위, 도처에 깔려있는 날카로운 생체지뢰 Teddy Bear Cholla Cactus, Pancake Prickly Pear, Agave, Silver Cholla Cactus 등을 이리 저리 피하며, 걷고 걷고 또 걸어 마침내 산줄기가 끝나는 사막의 평야부에 도착한다(22:27; 20.0마일; 1206’). 잠시 바닥에 주저앉아 다리를 쉬며 숨을 돌린다.

이젠 정말 다 왔다는 안도감으로 다들 표정이 밝아진다. 거대한 모래둑(Escarpment)의 동쪽 끝부분을 거쳐(20.7마일; 1070’), 마침내 S22의 Thimble Trailhead에, 그래도 다행히 자정을 넘기지 않은 이른(?) 시각에 도착한다(23:10; 21.3마일; 981’; 8370’ Gain).

21마일의 쉽지 않은 길을 거의 18시간에 걸쳐 부지런히 걸어 산행을 무사히 잘 끝낸 대원들 모두가 고맙고 대견하다. 잠시, 너 나 없이 환한 얼굴과 목소리로 떠들썩하다. 서로 ‘Hi-Five!’로 기쁨과 신뢰의 정을 나누고, 각자 헤어져 귀갓길에 오른다.

일우와 나, 그리고 제이슨과 써니, 우리 4인의 한인들은 Trailhead의 Campsite에 세워놓은 Tent에서 다시 밤을 지새기로 한다. 늦은 시각이지만 그래도 뭔가 배를 채우고 잠을 자야겠는데, 마침 제이슨이 컵라면을 준비했다면서, 이것으로 요기를 하면 어떻겠는가 묻는다. 불감청 고소원! 우리들 단군의 후예들 넷이서 이 거친 사막땅의 모래밭에 주저 앉아, 밤 하늘의 영롱한 별빛아래 감사와 기쁨으로 뜨거운 ‘배달겨레의 국민간식’을 먹는다.

일요일 이른 아침에, 30마일 떨어진 등산시작점으로 가서, 어제 새벽에 세워놓은 내 차를 찾는다. 일우, 제이슨, 써니는 오늘 오후에 잉글우드 소파이 스테디움에서 펼쳐질 프로풋볼 결승전을 지켜 볼 또 다른 흥분을 안고, 나는 그저 모처럼 가지게 되는 한가한 일요일 하루를, 20년 가까운 세월 내내 일요과부 처지를 기꺼이 감당해주고 있는 아내 곁에서, 게으름을 피우며 눈칫밥도 먹어볼 야무진 꿈을 지니고, 언제나 그랬듯 부지런히 LA의 집을 향하여 달려간다. 2022-02-14 정진옥 310-259-6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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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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