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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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식가와 대식가가 만났다…역사가 된 북미 정상의 식탁

2021-11-03 (수) 이용재 음식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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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용재의 식사 - 북미 정상회담 연회 메뉴

2018년 6월 12일, 초미의 관심사였던 북미정상회담이 싱가포르에서 열렸다. 음식의 상징성을 정치에 활용하는 역사가 깊다는 걸 감안하면 만찬의 메뉴는 늘 분석의 대상이 된다. 1939년, 영국왕 조지 6세 부처가 먹었던 핫도그가 좋은 예이다. 2차 세계대전 지원 요청을 위해 미국을 방문한 조지 6세 부처에게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당시 미 대통령은 뉴욕 하이드 파크에서 피크닉을 열어 핫도그를 대접했다. 미국의 서민 음식을 대접해 왕족에게도 소박한 면모가 있음을 보여줌으로써‘남의 전쟁’ 참전에 국민이 품을 불만을 잠재운다는 의도였다.

한국에서는 여야 영수 회담의 메뉴로 비빔밥이 빈번히 등장한다. 한데 아우른다는 상징성을 지닌 음식으로 정쟁 혹은 갈등 해소의 의사를 표명하는 수단이다. 비빔밥은 지난 6월, 이준석 국민의힘 당대표가 취임을 수락하면서 준비한 연설에도 등장한 바 있다. 그만큼 한국에서는 화합과 공존의 정치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한편 2018년 4월 27일에 열렸던 남북정상회담에서는 북한이 옥류관에서 평양냉면을 가지고 와 ‘깜짝 메뉴’로 소개한 바 있다. 당시로서는 전향적이었다고 볼 수 있는 북한의 의지를 표명하는 수단으로 쓰였다.

이처럼 정치적인 상징도 중요하지만, 먹는 이들의 입맛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음식은 반쪽짜리로 전락한다. 게다가 보통 식사도 아니고 국가의 수반, 즉 국빈의 만찬이니 만큼 이들의 취향이 사전에 충분히 고려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트럼프 전 미 대통령과 김정은 의장의 식성은 과연 어떨까?


일단 트럼프 전 미 대통령의 경우는 한마디로 ‘섬세함이라고는 없는 올 아메리칸(All-American)’이라 규정할 수 있다. 일단 그는 어떤 음식보다 햄버거를, 그것도 전 세계에서 미국의 상징으로 통하는 맥도날드를 좋아한다. 맥도날드에서 그는 한 번에 빅맥과 필레오피시(생선살 버거) 두 개, 초콜릿 밀크셰이크를 시킬 정도로 대식가이다. 햄버거에 딸려오지 않으면 매우 섭섭한 감자튀김을 헤아리지 않고도 총 열량이 2,500칼로리, 즉 성인 남성 일일 권장 열량과 같은 수준이다. 한편 스테이크를 웰던으로 구워 케첩을 찍어 먹고 서민 음식인 미트로프(간 고기와 채소를 식빵 모양으로 빚어 구운 음식)를 좋아하며 콜라를 마시는 등 미식에는 별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 듯 보인다.

한편 스위스에서 유학했던 김정은 위원장은 서구화된 입맛의 대식가라고 알려져 있다. 그의 요리사로 13년 동안 일했던 후지모토 겐지는 김정은이 일본의 와규 스테이크, 스시, 스위스의 에멘탈 치즈를 좋아한다고 밝힌 바 있다. 2015년 6월 영국의 ‘더 메일’지와 가졌던 인터뷰에서는 스시와 고가의 샴페인(할리우드 명사들이 좋아하는 루이 로드레)이 김정은의 체중 증가 원인이라고 언급했다. 앉은 자리에서 샴페인을 두 병, 즉 1.5리터를 마실 만큼 애주가를 넘어선 대주가라는 것이다. 그밖에도 에멘탈 치즈를 너무나도 좋아한 나머지 2014년, 전문가 3명을 프랑스 국립 유가공학교에 보내 교육시키려 했으나 요청이 거부당해 성사시키지 못했다.

이런 두 사람의 취향이 만찬에 어떻게 반영됐을까? 싱가포르 센토사 섬 카펠라 호텔에서 등장했던 메뉴는 다음과 같다.

북미정상회담의 만찬은 크게 전채와 주요리, 후식의 3코스에 각각 세 가지 요리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구성이었다.

■전채

식사의 시작에서 가볍게 입맛을 돋워주는 전채를 살펴보자.

◇전통적인 새우 칵테일과 아보카도 샐러드


영국에서 기원해 미국에 뿌리를 내린 양식의 대표적인 전채 가운데 하나이다. 데쳐 차갑게 식힌 새우와 케첩, 홀스래디시 등으로 만든 특유의 칵테일 소스를 함께 낸다. 특히 맨해튼을 중심으로 발달한 남성의 사교 공간이자 레스토랑인 스테이크하우스의 대표 메뉴이기도 하다. ‘칵테일’이라는 이름에 충실하기 위해 마티니잔에 소스를 담고 가장자리에 새우를 걸쳐 내기도 한다.

◇꿀 라임 드레싱의 그린 망고 케라부와 문어

케라부는 말레이시아식 샐러드로, 한식의 무생채와 약간 비슷하다. 신맛이 강한 설익은 망고를 라임즙과 액젓 등으로 버무려 감칠맛이 폭발하는 한편 고수나 박하, 레몬그라스 같은 허브의 생생한 향이 두드러진다. 국내에서는 비슷한 태국의 파파야 샐러드 ‘솜땀’을 먹을 수 있다.

◇오이선

어슷하게 썬 오이에 칼집을 넣어 쇠고기, 표고버섯, 황백 지단 등을 끼운 뒤 새콤한 촛물을 끼얹어 만드는 전통 한식으로, 사실 국내에서조차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현실인데 만찬에 등장했다.

■주요리

주요리 셋 가운데서는 두 가지가 조림이다.

◇소갈비 콩피, 감자 도피누아즈와 찐 브로콜리, 레드와인 소스

콩피란 재료를 끓는점보다 낮게 데운 기름에 오래 뭉근하게 익히는 프랑스의 요리법이다. 재료를 지방에 담그다 보니 미생물의 번식을 억제해 식품의 장기 보존법으로 고안되었다. 다만 기름은 물보다 열에너지의 전달이 완만하므로 재료를 천천히 익힐 수 있어 육류 가운데서도 오래 익혀야 부드러워지는 고기나 부위의 조리법에 많이 쓰인다.

한식에서는 갈비가 구이용 부위이지만 호흡기를 감싸는 뼈 사이의 살이라 운동을 많이 해 질긴 편이니 조림에 잘 어울린다. 오리 다릿살이 콩피의 단골 식재료인데, 지방이 많은 고기나 부위라면 식재료 자체의 기름을 녹여 그대로 익힌다. 만찬의 콩피도 갈비 기름으로 익혔을 것이다. 감자 도피누아즈는 프랑스의 남동부 도피네 지방에서 먹는 그라탕으로, 썬 감자를 켜켜이 쌓고 우유나 크림을 부은 뒤 오븐에 구워 만든다. 술을 마시지 않는 트럼프 대통령의 특성을 감안해 레드와인 소스를 곁들이로 따로 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수제 XO소스의 양주식 볶음밥

양저우차오판(揚州炒飯)은 장쑤성 양저우의 이름을 달고 있지만 광둥지방의 볶음밥이다. 광둥지방 출신이 화교로 세계에 가장 많이 퍼져 나갔으니 웬만한 중식당에서 먹을 수 있는 볶음밥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소스를 발라 바삭하게 구운 돼지고기 챠슈와 새우를 함께 볶는 게 양저우차오판의 특징이다. 한편 XO 소스는 말린 패주, 새우 등을 조려 만든 해산물 바탕 소스로 1980년대에 홍콩에서 처음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정설로 통한다. XO라는 이름은 ‘Extra Old’라는, 고급 코냑에 붙는 접두사에서 왔다.

■후식

대미를 장식하는 디저트는 세 가지 모두 서양식이다.

◇다크초콜릿 타르틀렛 가나슈

버터와 밀가루의 바삭한 껍데기(크러스트)에 소를 채워 구운 디저트를 타르트라 부르고, 이를 개인용으로 작게 구우면 지소형인 ‘타르틀렛’이 된다.

따라서 초콜릿을 생크림에 녹인 소스인 가나슈를 크러스트에 채워 만든 타르틀렛이다.

◇하겐다즈 바닐라 아이스크림과 체리 쿨리

쿨리는 걸쭉하게 끓인 과일 소스를 의미한다. 따라서 ‘체리 소스를 곁들인 바닐라 크림’인데, 굳이 공산품인 하겐다즈를 선택한 이유가 따로 있어 보인다.

유럽의 브랜드처럼 들리지만, 하겐다즈는 바로 그런 분위기를 자아내기 위해 작명한 미국 브랜드이다. 따라서 미국을 존중하는 제스처로 하겐다즈가 쓰였을 가능성이 높다.

◇트로페지엔

트로페지엔은 프랑스의 생트로페즈 지방에서 유래한 파이이다. 버터와 계란을 풍부하게 넣어 만든 브리오류 같은 빵을 반 갈라 커스터드 크림을 발라 만든다. ‘맘모스빵’과 조금 비슷한데 1955년, 폴란드 출신의 파티셰 알렉상드레 미카가 처음 만들었다.

프랑스의 여배우 브리지트 바르도가 ‘그리고 신은 여자를 창조했다’를 생트로페즈에서 촬영할 당시 이름이 붙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이용재 음식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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