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탄에 맞아 몸이 꺾이는 병사, 격랑에 휩쓸리는 아이 … 전쟁이나 천재지변의 현장에서 절체절명의 순간을 담은 사진들을 볼 때면, 어린 시절, 궁금한 게 있었다. 사진기자는 그 순간 왜 사람을 구하지 않고 사진을 찍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접근 불가한 곳이었을 수도 있고, 달려가 구할만한 시간이 안 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직업상 구조보다 기록이 먼저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왜 구하지 않았을까, 왜 사진만 찍고 있었을까 - 의문이 아니라 분노를 폭발시킨 사건이 일어났다. 지난 13일 밤 필라델피아 북쪽 통근열차 안에서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다. 저녁 9시15분부터 40여분 동안 노숙자 남성이 옆자리의 여성승객을 성희롱, 성추행하다가 결국은 강간까지 했는데도 승객 중 누구도 개입하지 않았다.
당시 상황은 열차 내 감시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겼다. 동영상을 검토한 경찰당국에 따르면 열차 안에는 꽤 많은 승객들이 있었고, 여성은 계속 가해자를 밀쳐내며 저항했다. 여성이 더 이상의 강경한 대응을 못한 것은 음주와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추행의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여성을 위해 나선 사람은 없었고, 대신 저마다 셀폰을 사건현장 쪽으로 치켜든 모습이 잡혀있다. 셀폰의 시대에 ‘흔치 않은 구경거리’라며 카메라를 들이댔을 것이었다.
타자의 고통에 먼지만큼의 아픔도 느끼지 못하는 철저한 방관, 사람이 사물로 취급되는 21세기 비인간적 사회의 단면이다.
사건은 지나가는 열차 안을 우연히 들여다본 교통국 직원이 신고한 덕분에 끝이 났다. 신고를 받은 경찰은 다음 정거장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가해자를 성폭행 현행범으로 체포했다.
열차가 소속된 사우스이스턴 펜실베이니아 교통국의 경찰국장은 모든 사람이 분노하고 역겨워할 것을 촉구했다. 열차 안이라는 공공의 공간에서 여성이 짓밟히는 광경을 보고도 분개하지 않는다면 시민정신에 문제가 있다는 의미로 짐작된다. 분노하고 신고하라는 것이다. “10살짜리 자녀가 봐서는 안 될 행동이다 싶으면 즉시 911에 전화하십시오.”
성폭행 사건을 담당한 어퍼 다비 경찰 고위당국자 역시 승객들의 방관과 무관심을 지적하며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개탄했다.
인간과 인간은 본래 어느 정도의 유대감을 갖고 있는 걸까.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도 어려움에 처한 것을 보면 마음이 쓰이고,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질 것 같으면 저도 모르게 달려가 구하게 되는 것, 인간이 인간에 대해 갖는 근원적 끌림이다. 맹자는 이를 측은지심이라고 했다. 이렇게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필라델피아 열차 안에서 측은지심은 없었다. 맹자의 기준으로 보면 사람이 아닌 상태, 인간성의 상실이다. 현대 자본주의가 깊어지면서 사회는 인간 중심에서 돈이나 권력 등 사물 중심으로 바뀌었고 그만큼 사회 구성원의 소외와 비인간화는 심각해졌다. 남과의 연결의식이 약하니 방관이 몸에 밴다.
열차 내 승객들이 어째서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는지 알 수 없지만, 우선 지적되는 되는 것은 ‘방관자 효과’이다. 1964년 뉴욕, 퀸즈에서 잔혹하게 강간 살해된 키티 제노비스 사건 이후 만들어진 사회심리학 용어이다. 밤 근무를 마치고 새벽 3시에 귀가하던 여성이 강도의 공격을 당했는데, 비명 소리에 30여명의 인근 주민들이 불을 켜고 내다보았지만 아무도 여성을 도우려하지 않았고 경찰에 신고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사회적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당시 뉴욕타임스의 보도는 과장된 오보로 훗날 밝혀졌지만 방관자 효과는 심리학계의 중요한 연구 주제로 자리 잡았다.
방관자 효과란 주변에 사람들이 많을수록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지 않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나서겠지 하고 서로 미루는 것이다.
2011년 메모리얼 데이, 북가주 알라미다에서 53세의 남성이 바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들이 물에 빠져 죽으려 한다고 어머니가 신고를 하자 소방대와 경찰이 출동하고, 해변에는 수십명이 모여들었다. 하지만 누구도 물에 들어가지 않았다. 경찰은 소방대가, 소방대는 경찰이, 주민들은 공공 안전요원들이 구조에 나서리라 기대했다. 결국 남성이 쓰러지자 한 시민이 헤엄쳐 들어가 그를 끌어냈지만, 남성은 사망했다. 방관자 효과의 대표적 사례이다.
그런가 하면 어느 한사람이 앞장서면 다른 사람들이 따라 나서는 것이 방관자 효과의 다른 면이기도 하다. 필라델피아 열차 안에서 누군가 한사람만 나섰더라면 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인간에게는 두 가지 상충된 욕구가 있다. 남을 짓밟고라도 살아남으려는 이기적 본능 그리고 남과 하나가 되어 고립을 면하려는 이타적 욕구이다. 나누고, 내어주고, 타인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는 성향이다. 두 가지 욕구가 조화를 이룰 때 우리는 건강하다. 우리가 건강하면 사회가 건강해진다. 필라델피아 열차 안에서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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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