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인간들의 삶의 조각들을 에피소드 식으로 엮은 블랙 코미디

2021-04-30 (금) 박흥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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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흥진의 영화 이야기 - 새 영화 ‘무한에 관하여’(About Endlessness) ★★★★(5개 만점)

▶ 인간의 심오한 존재·무한에 관한 단상, 우행과 결점 비웃는 현대판 ‘천일야화’

인간들의 삶의 조각들을 에피소드 식으로 엮은 블랙 코미디

두 연인이 공중을 유영하면서 지상의 인간들의 삶의 편린들을 내려다 보고 있다.

스웨덴의 미니멀리스트 감독(각본 겸) 로이 앤더슨이 저 멀리서 그리고 공중 높이서 내려다 본 인간들의 삶의 조각들을 에피소드 식으로 엮은 블랙 코미디이자 심오한 존재와 무한에 관한 단상이다. 샤갈의 그림을 연상케 하는 꼭 끌어안은 두 연인이 공중의 구름 위를 유영하며 지상의 인간들을 내려다보면서 이들의 우행과 결점을 신맛 나게 이죽거리듯이 비웃은 얘기는 마치 현대판 ‘천일야화’를 생각나게 만든다.

담담하고 차분히 진행되는 영화는 가볍고 사뿐하고 또 때로는 황당무계하고 통렬하며 침울한데 궁극적으로 인간들의 평범한 일상생활과 날마다 겪어야하는 고통의 뒤에 과연 무엇이 있느냐를 묻고 있다. 이에 대한 명백한 대답이 있을 리가 없는데 감독은 영원의 본질을 찾고 깨달으려고 애를 쓰라고 촉구하고 있다.

여러 편의 꿈과도 영화는 한 여인의 각 에피소드가 열릴 때마다 “나는 보았다”라며 시작하는 내레이션으로 서술된다. 영화가 지닌 주제 중 하나가 인간들이 영원의 본질로부터 피하기 위해 어리석은 진부함에 머물러 있는 것을 탓하는 것. 이를 보여주는 한 에피소드가 호젓한 길에서 차가 고장 난 사람이 자기 머리 위로 철새들이 떼를 지어 비상하는 황홀한 장면을 보지 못하는 것. 그리고 바에 들른 치과의사가 술이 너무 좋아 술잔만 내려다보면서 남들이 다 찬탄하는 창 문 밖으로 막 내리기 시작한 첫 눈을 돌아서서 바라다보기를 마다하는 모습이 또 다른 에피소드다.


믿음과 전쟁도 영화의 중요한 주제가 되고 있다. 믿음을 잃고 고뇌하는 현대 복장을 한 신부가 십자가를 지고 갈 때 사람들이 그를 채찍질 하자 신부는 “내가 그들에게 무엇을 했단 말입니까”라고 묻는다. 이와 함께 폭격에 폐허가 된 도시 한 가운데 뼈대만 남은 채 서 있는 성당이 보는 마음을 숙연케 한다. 무한의 개념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 눈이 내리는 가운데 지친 독일 군 포로들이 시베리아의 포로수용소로 걸어가는 모습. 그 행렬의 끝이 무한처럼 보이질 않는다. 이런 가운데 위로 폭탄이 터지는 대피소 속에 세 명의 술 취한 나치장교들이 피신해 있을 때 이 안으로 창백한 히틀러가 뒤뚱거리며 들어온다. 내레이션이 “나는 세계를 정복하기를 원하는 사람을 보았는데 그가 실패할 줄을 알았지”라고 말한다.

이 밖에 빗속에 어린 딸의 풀어진 운동화 끈을 묵묵히 매어주는 아버지는 마치 바위 굴려 올리기의 반복 행위를 하는 시지포스와도 같고 아들의 무덤을 찾아와 아들이 들으라고 큰 소리로 말하는 부모는 삶 이후에 대한 인간들의 심오한 반응을 모색하고 있다. 또 고등학생인 소년과 소녀가 물리책의 열역학의 첫 법칙을 읽으면서 에너지는 새 형태로 변이될 뿐이지 결코 만들어지거나 파괴될 수 없으니 우리는 백 만년 쯤 지나면 각기 감자와 도마도가 되어 만날지도 모른다는 부분도 재미있다.

영화의 요지는 인간은 그들의 행위에 이어 이에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반복적이요 상투적인 반응을 초월할 수 있다는 것이다. 통상적이요 진부한 일상을 너머 영원과 무한의 의미를 찾아보자고 독려하고 있다. 심각하나 재미있는 영화로 몽환적인 촬영이 매우 아름답다.

<박흥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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