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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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등(無盡燈)] 협업

2021-04-29 (목) 동진 스님 (SAC 영화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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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이 깊어지면 영화사엔 줄장미, 산수국, 해당화 등, 어여쁜 꽃들도 많이 피지만, 5 에이커의 들판엔 풀들도 무성해진다. 무릎까지 웃자란 풀들이 바람에 일렁이는 모습은 장관이지만, 깎기 어려워지기 전에, 트랙터로 풀을 깎아야 할 시기가 왔다는 뜻이다. 풀을 깎기 시작하면 영화사가 얼마나 넓은지 새삼 알게 된다. 아침 일곱 시부터 해질 때까지, 꼬박 하루해가 걸린다. 이사 온 초반엔 이 중이 스스로 했던 적도 있지만, 알러지로 눈물 콧물 흘리며 몇 번 앓아누운 후론, 일꾼을 산다. 해가 뉘엿뉘엿해질 무렵, 서향의 드넓은 들판이 단정한 단발이 되고, 그 위로 석양빛이 쏟아지면, 왠지 모를 울컥함에 목이 메인다. 일하는 이도 힘들지만, 혼자 하루종일 트랙터 소리 들으며 일꾼을 움직이는 것도, 힘든 노동이기 때문이다. 처음엔 일로 잔소리도 많이 했지만, 지금은 안 한다. 이 중이 요구하는 일이, 전문인이 보기에 마땅한, 일이 아니었음을 알게돼서다. 초반엔 일꾼이 번번이 요구를 무시해서 속상했었다. 돌이켜 보면 미안해진다. 쉽게 말해, 전문쉐프에게 일반인이 요리에 대해 코치하는 격이었다. 지금은 멕시칸 영어와 코리안 영어론 피차 알아듣지 못해도, 일꾼과 일꾼의 스킬로, 노동자, 특히, 농부의 노하우로, 말없이도 피차에 소통이 가능해졌다. 이 중이 모르던 여러 들일을 배워, 진짜 농부가 돼서다. 정해진 법회를 하고, 매일 참선과 백팔배를 하는 시간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이 중은 농사 일로 살고 있다. 농부인 스님이다. 야드 노동의 어려움과 그 일을 전문으로 하는 이들을 이해하게 됐고, 그들의 노동에 대해 감사할 줄 알게 됐다. 일꾼도 더이상 눈속임을 하지 않고, 더러는 시키지 않은 일도 처리해준다. 문자 그대로 '동업'이 늘어난 것이다. 업이 같다,라는 것을 일러 동업이라고 한다. 동업인 이들은 굳이 말을 안해도 소통이 된다. 업이라는 한문 글자를 보면 수많은 작대기 획수가 꼼꼼히 모여있다. 이처럼, 수많은 하루하루가 모여 우리의 업이 이루어진다. 이 중이 10년 새 미국 농부가 된 것이 그 증명이다. 업은 촘촘히,꾸준히, 많이 하는 것으로 드러나고, 전생업, 현재업, 미래업으로 상속되어, 너와 나를 만들고, 우리를 만든다. 같은 일을 오래 하면 동업이 늘고, 업은 같은 업을 부른다. 농부는 농부끼리, 도둑은 도둑끼리, 정치인은 정치인끼리. 이 끼리끼리는 집단을 이루고, 그 집단이 커지면 권력을 갖게 되고, 자주 그 권력은 소수에게 폭력으로 군림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사회에 차별이 발생하고, 그 차별은 인종과 종교를 넘어, 모든 삶을 관통하게 된다. 차별은 다른 업을 모르는 데서 온다. 쉽게 말해 모른다는 걸 모르는 무식이다. 모르는 건 어렵다. 잘 모르는 데서 오는, 대하기 어려움을 차별로 표하는 것이다. 어려운 시험문제 처럼 안 보고 싶다. 그러나 모르는 건 배척할 일이 아니라 배울 일이다. 알면 이해가 된다. 그런 노력 이전에, 틀렸다고 착각하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은 게 문제다. 모르면서 '너'가 틀렸다고 주장하면 오류다. 오류는 충돌을 낳고, 충돌은 혼란을 야기 시킨다. 그래서, 세상의 평화로움을 위해서는, 피차가 모르는 서로의 다른, 부분에 대해, 알아라, 주장하거나, 차별을 휘두를 게 아니라, 모른다,의 겸허한 자세를 서로 먼저 내줘야 한다. 주관식 문제 모르면 겸손히 빈칸을 남기 듯이, 서로가 모르는 부분의 빈칸을 내어놓고, 그리고 그 빈칸을 채울 수 있는 여타의 사람이 있음을 감사히 여길줄 알아야 한다. 모르면서 오답을 적고, 무시하고, 외면하면, 세상은 정답이 될 수 없다. 피차 모르는 부분을 인정해야, 다른 이의 존재이유를, 그 중요성을 알게 된다. 본인이 몰라서 부족한 부분을, 다른 이가 채워줬기 때문에, 삶에 부족함을 덜 느끼며 살고 있단 것을 감사히 받아들이게 된다. 수학과 국어와 과학....이 다 있어야 세상이 돌아가는 것이다. 세상은 요철처럼 서로 부족분을 채워주며 움직이는 것이다. 협업이고, 공존이며 소통이다. 작금의, 모르는 현상 투성이인, 갑자기 넓어진 이 혼란의 글로벌 세상에서,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부분이다.

<동진 스님 (SAC 영화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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