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은 말 그대로 “대승(큰 수레), 즉 대승불교에 대한 믿음을 일으키(려)는 논서”다. 석가모니 부처님 사후 약 600년이 지난 뒤 인도의 마명보살(馬鳴菩薩/Aśvaghoṣa/아슈바고샤, 100-160년)이 저술했다는데 산스크리트어 원본 같은 게 없이 중국 양(梁)나라 때 편집된 한역본 2종만 전해진다. 때문에 실제로 누가 언제 쓴 것인지를 두고 연구자들의 의견이 엇갈린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진수를 잘 집약한 문헌이라는 데는 거의 모두의 의견이 일치한다. 그렇다고 아무나 이해하기 쉬운 책은 아니다. 상식적으로 보면 온통 뜬구름 잡는 이야기 같다. 과학적으로 보면 어떨까. 이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소광섭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명예교수가 ‘물리학과 대승기신론’이란 제목으로 행한 불교방송(BBS) 열린강좌(사진)를 2차례 나눠싣는다. 이 강좌는 BBS 유튜브채널에 2018년 7월 업로드된 것이다. <편집자>
앞으로 오는 시대에 물리학은 더욱 발전할 것이다. 그럴수록 부처님 말씀을 이해하기가 더욱 쉬워질 것이다. 불교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현대물리학의 기본인 양자물리학을 기본으로 강의를 진행하려 한다.
뉴턴이 완성한 고전물리학에서 자연현상은 객관적 실재로 인식된다. 금광의 금과 같은 것이다. 그걸 캐든 말든 캐려고 마음을 먹든 말든 금은 거기에 있다. 자연현상의 법칙도 내가 관찰하든 말든 그 자체로 있는, 항구적이고 불변하는 법칙이다, 사과는 내가 쳐다보든 말든 떨어지듯이. 뉴턴의 운동법칙(힘=질량x가속도/F=ma)으로 달이 28일 얼마 만에 한 바퀴 돈다든가 지구가 365일 얼마 걸려 태양을 돈다든가 인천 앞바다의 조수간만의 차이가 어떻다든가, 일식과 월식 이런 걸 다 계산해낸다. 그러니 서양사람들이 뉴턴이 있어 이 세상의 진리를, 하나님의 진리를 다 밝혔다고 생각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건 우리끼리 이야기다. 먼 은하, 삼천대천세계에서도 그 법칙이 다 통할까. 또 원자의 세계에서도 통할까. 원자의 세계에서는 힘과 가속도라는 말로 전자의 활동을 전혀 설명할 수 없다. 그런 개념 자체가 없다. 고전물리학의 법칙은 극히 제한적 법칙이다.
현대물리학은 크게 두 개의 발견으로 구성돼 있다. 하나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다. 힘이나 가속도 개념없이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이다. 두번째는 양자역학인데 그 소립자론(양자장론)은 1980년대 나온 이론과 실험들을 끝으로 현재까지 정체상태다. 물리학이 한창 발전돼 궁극의 물질을 찾은 것 같이 착각됐다가 지금은 오리무중이다. 우주가 어떻게 시작됐는가 많이 들어봤을 빅뱅, 이 태초의 순간을 이해하려면 소립자를 알아야 되는데 소립자를 모르니 대폭발의 순간을 모르고 대폭발 순간을 모르니 소립자를 모르는 그런 상태다. 소립자를 더 자세히 보고 싶다면 현재의 과학으로는 가속기를 더 크게 만드는 것 외에는 없는데 돈이 너무 많이 들어 미국도 포기했다. 새 아이디어가 나와야 한다.
양자역학은 파동역학이라고도 한다. 이것의 특징은 불확정성이다. 과학은 확실한 게 특징인데 아이러니다. 우리는 과학은 확실한 것이다, 부처님 말씀도 확실한 과학으로 입증됐다, 이렇게 말하고 싶은데 유감스럽게도 과학은 불확실한 것에 바탕하고 있다. 이 불확실한 것을 좀 더 확실하게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대상을 자세히 관찰한다는 것은 속도와 위치를 정확히 측정한다는 것이다. 자동차의 경우 그게 가능해서 속도위반 딱지를 뗄 수 있지만 원자의 세계에서, 스마트폰이나 반도체 이런 IT기기에 들어있는 전자의 속도를 측정해서 야 너 속도위반이야 이렇게 할 수 있는가. 알고자 하면 관찰을 해야 한다. 불확정성의 원리란 것은 그 관찰에 관한 법칙이다. (결론은) 전자의 속도와 위치를 동시에 정확히 잴 수 없다는 것이다. 속도를 알아내면 위치를 알 수 없고 위치를 찾아내면 속도를 알 수 없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현대과학은 이 불확실성에 바탕하고 있다.
양자물리학의 핵심철학은 관찰할 수 있는 양만으로 세상을 이해한다, 자연 자체를 기술하지 않는다, 자연의 법칙을 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전 고전물리학은 자연현상 자체를 연구한다고 생각했지만 현대물리학은 자연현상을 관찰하는 것에 관한 연구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관찰자는 카메라, 센서 같은 것을 통틀어 말한다. 센서들의 관찰능력의 한계, 이게 불확실성이다. 인간에게 센서는 오감이다. 인공지능이 극대화되고 있어서 앞으로 우리의 머리가 하는 많은 일을 인공지능이 대체할 것이다.
그럼 인공지능은, 예컨대 이세돌과 알파고가 바둑을 뒀는데 그 알파고는 자신이 바둑을 둔다고 인식할까, 이기면 이겼다고 기뻐할까. 물론 앞으로 인공지능에 감성을 넣어 슬프면 울게 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 그 인공지능이 슬퍼서 운다고 생각할까(어떤 조건에서 우는 프로그램을 넣어주었기에 우는 퍼포먼스를 하는 것일까). 앞으로는 이런 인식의 문제가 중요하게 대두될 것이다. 고전물리=자연의 법칙, 현대물리=관찰의 법칙이라면 미래물리는 인식의 법칙이 중심이 될 것이다. 인식은 마음의 문제다.
<출처: 불교방송 BBS 유튜브 채널, 요약정리-정태수 기자, 29일자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