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화요일마다 ‘하프타임’에 졸문을 올려야 하는 칼럼니스트로서 감당해야 할 작은 숙명이라 여겨온 것은 선거이다. 미국 선거는 예외 없이 화요일에 치러지기 때문에 밤늦게나 가려지는 후보들의 당락과 유권자들의 결정을 주제로 선거일에 칼럼을 쓰기란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니다.
다행히도 그동안은 여러 예측들과 개인적 직관을 토대로 생각을 다듬었다가 늦은 밤 윤곽이 드러나는 즉시 칼럼을 마무리 해 다음 날 아침 신문에 실을 수 있었지만 올 대선은 그럴 자신이 없다. 이런저런 이유들로 선거 다음날 아침까지 승자가 가려지지 않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기 때문이다. 당선자를 상정해 칼럼을 구상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다음 대통령에 거는 소박한 기대로 대신할 수밖에 없다. 누가 당선되든 그 기대의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을 테니 말이다.
영국의 민법학자인 제임스 브라이스는 1888년 “왜 훌륭한 인물은 대통령이 되지 못하는가”라는 유명한 의문을 제기했다. 훌륭한 자질을 가진 사람이 정당정치의 진흙탕 싸움을 견뎌내면서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오르는 게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는 것이 브라이스의 생각이었다. 그의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을 지녔지만 항상 옳았던 것은 아니다. 위대한 대통령으로 역사학자들의 평가를 받는 인물들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역사학자들이 예외 없이 위대한 대통령으로 평가하는 인물은 조지 워싱턴, 에이브러햄 링컨, 프랭클린 루스벨트 등 3명이다. 이들은 모두 훌륭한 개인적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국난이라는 시대적 상황이 아니었다면 위대한 대통령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위대한 리더십은 국가의 존망이 흔들리는 위기 속에서 싹트고 빛을 낸다. 뛰어난 개인적 자질을 위대한 리더십의 필요조건이라 한다면 국난은 충분조건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역사학자들의 박한 평가를 받고 있는 대통령들은 자신의 리더십을 제대로 발휘할만한 시대적 상황이 주어지지 않았다며 억울해할 만 하다. 그러나 이것을 위대한 대통령을 더 이상 기대하기 힘들어진 이유의 전부라 할 수는 없다. 위대한 대통령들의 시대와는 정치사회적 환경과 문화가 너무나도 달라졌기 때문이다.
특히 이념의 양극화와 매스미디어의 난립으로 국민들은 양분돼 있다. 미디어는 특정 인물을 부각시키기도 하지만 한 순간에 하찮은 존재로 전락시키기도 한다. 분열 속에서는 위대함이 싹트고 자라기 힘들다. 그런 점에서 이제 위대한 대통령의 시대는 저물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런 환경과 여건들 속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바람직한 대통령의 모습 역시 현실에 맞출 수밖에 없다. 미국에서 더 이상 위대한 대통령을 찾아보기 힘들게 된 이유를 다룬 책 ‘위대함의 종언’을 쓴 역사학자 애런 데이빗 밀러는 이제 우리는 ‘괜찮은 대통령’을 기대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괜찮은 대통령’이란 도덕적으로 큰 흠결이 없고, 법과 헌법을 존중하면서 국가를 이끄는 인물이다. 너무 평범하게 들릴지 몰라도 이런 평범함조차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어진 작금의 정치현실에서 이런 대통령을 갖는다면 그것도 축복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앞으로 4년 미국을 이끌어갈 지도자에게 국민통합의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해 달라는 당부를 하기가 조심스럽다. 이미 갈라질 대로 갈라지고 파편화된 나라에서 현실적으로 별로 가능해보이지 않아서이다.
다만 밀러가 제시한 ‘괜찮은 대통령’의 기준에 부합하려고 노력하면서 항상 상식 위에서 국정을 이끌어가는 대통령이면 충분하다. 상식적인 자세와 정서를 보여주는 리더십을 말한다. 위기가 닥쳤을 때 전문가들의 견해에 귀를 기울일 줄 알고 잘못된 판단을 했을 경우에는 이를 시인하고 국민들의 이해와 용서를 구하는 겸손과 용기까지 보여준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상식적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위대한’ 일인지를 우리는 지난 몇 년 동안 매일매일 목도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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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성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