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白), 만주군 장교⇒한국전 호국영웅⇒친일파 낙인 안고 별세
▶ 박(朴), 인권변호사⇒서울시장⇒여비서 성추행 의혹 품고 자살, 불(佛), 호국불교 자랑하던 승려들 박 시장 빈소만(?) 연쇄 조문
◆백선엽(白善燁, 왼쪽 사진): 일제하 1920년 11월23일 평남 강서에서 출생해 만 100세를 넉달쯤 앞둔 2020년 7월10일 서울에서 별세. 일제가 세운 만주국의 중앙육군훈련처를 졸업하고 1943년 4월부터 조선(한국) 해방(1945년 8월)까지 반만항일(反滿抗日)세력 토벌을 위한 간도특설대(間島特設隊) 장교로 복무(해방 당시 중위). 광복직후 평양에서 민족주의자 독립운동가 조만식(曺晩植, 1883년 2월~1950년 10월) 선생의 비서로 일하다 북한에 소련군이 진주하자 그해 12월 월남.
남조선국방경비대(국군)에 들어간 그는 한국전(1950년 6월~1953년 7월) 내내 제1사단장, 제1군단장, 제2군단장,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한국군 1호 대장)으로 최전선을 누볐다. 특히 다부동전투 등 낙동강전선에서 파죽지세의 북한군을 격퇴함으로써 신생 대한민국이 궤멸직전에 소생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고 평가된다. 전후 그는 육군참모총장(1957년) 연합참모의장(1959년)을 거쳐 1960년 전역한 뒤 중화민국(대만) 프랑스 캐나다 등 우방국 대사를 지냈고 1969년 10월부터 1971년 1월까지 교통부장관 재임중 서울의 1기 지하철 건설을 지휘했다.
▶백선엽 논란: 우파진영과 미국 등 우방국은 한국전 공훈에 초점을 맞춰 그를 대한민국을 구한 전쟁영웅 내지 20세기 이순신 등으로 추앙한다. 주요 상훈: 금성태극무공훈장, 을지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 금탑산업훈장, 미국 은성무공훈장, 미국의 공산주의 희생자 추모협회 제정 제2회 자유수호의상(Truman-Reagan-Freedom Award, 2000년), 캐나다 무공훈장(2005년), 코리아소사이어티 밴 플리트 상(2010년), ‘미8군 명예사령관’ 추대(2013년) 등. 좌파진영은 간도특설대 복무 등에 초점을 맞춰 그를 친일파로 규정한다(2009년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등재). 이 위원회와 집권 더불어민주당 일부 의원 등은 백선엽의 현충원 안장에 반대했다(결국, 서울 대신 대전현충원에 안장).
백선엽 본인은 간도토벌대에 있었으나 “독립군을 구경도 해보지 못했는데 무슨 토벌을 하느냐”(2009년 인터뷰) 등 강력 부인했다. 위키백과에는 “그의 임관 전에 이미 조선인독립군은 자유시참변(1921년) 등으로 거의 소멸됐고 잔존세력은 중국공산군으로 편입됐기에 백선엽 지휘하에 희생된 조선인 독립군은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절대적이다"는 취지로 적혀 있다.
한편 미 국가안전보장회의(NSC)는 12일 공식 트위터를 통해 “백 장군이 9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것을 애도하며 그의 유산에 경의를 표한다”며 “한국은 1950년대 공산주의의 침략을 격퇴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친 백선엽과 영웅들 덕분에 오늘날 번영한 민주공화국이 됐다”고 평가했다. 이밖에도 “백선엽 장군 사망은 한국과 한미 동맹의 큰 손실”(존 틸럴리 전 주한미군 사령관), “백선엽 장군은 한국군의 아버지...그가 한국전에서 혼란스럽고 극도로 불확실한 전투 속에서 한국군을 거듭 승리로 이끌었던 것은 조지 워싱턴의 독립전쟁 승리와 비교할 만하다...우리는 세계의 위대한 군사 지도자 중 한 사람을 잃었고, 나는 진실한 친구를 잃었다”(버웰 벨 전 주한미군사령관), “그는 지난 70년 동안 한미동맹을 강화했고 동맹이 깨지지 않도록 만든 진정한 영웅이자 애국자”(제임스 서먼 전 주한미군사령관), “백 장군은 오늘날 한미동맹을 만드는 데 공헌한 영웅이자 국보”(로버트 에이브럼스 현 주한미군사령관), “백 장군은 현대 한미동맹 구축을 주도했다”(해리 해리스 현 주한미국대사) 등 존경어린 찬사와 추모가 잇따랐다.
◆박원순(朴元淳, 오른쪽 사진): 1956년 3월26일 경남 창녕에서 출생해 2020년 7월9일 서울에서 자살. 1975년 서울대 사회계열 입학 뒤 수개월만에 긴급조치 위반(유신반대운동)으로 구속되면서 제적. 석방후 단국대 사학과 진학. 1980년 사법고시에 합격해 1982년 대구지검 검사가 됐으나 6개월만에 퇴직하고 이듬해 변호사 개업. 1986년 역사문제연구소 초대이사장, 1988년 민변 창립회원, 1989년~1991년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1986년 6월 부천서 문귀동 경위에 의한 서울대 여학생 성고문사건이 발생하자 조영래 변호사 등과 함께 피해여대생을 변호하며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 공론화에 앞장섰다. 1993년 서울대 화학과 신정휴 교수가 우00 조교(여)에게 성적 괴롭힘을 가한 사건(대한민국 1호 직장내 성희롱 소송)을 맡아 6년간 투쟁끝에 승소했다. 1998년 한국여성단체연합이 주는 제10회 ‘올해의 여성운동상’을 받았다.
1995년~2002년 참여연대 사무처장, 1998년 감사원 부정방지위원대책위원회 위원, 1999년 국회 제도운영개혁위원회 위원, 2000년에는 일본군 성노예전범국제법정 공동검사, 2000년 부패방지입법시민연대 공동대표, 2001년~2010년 아름다운재단 창립자 겸 상임이사, 2002년~2009년 아름다운가게 창립자 겸 상임이사, 2006년 3월~2011년 9월 희망제작소 창립자 겸 상임이사를 맡는 등 한국의 대표적 시민운동가로 이름을 떨쳤다. 스탠포드대 비지팅 스칼라(방문교수)로 있던 2005년에는 북가주아름다운재단 창립을 뒷받침 내지 주도했다(시애틀에서 연수중이던 안철수 박사가 축사 겸 특별강연).
2011년 9월 오세훈 서울시장이 사퇴하자 당시 여론조사 압도적 1위였던 안철수의 양보를 받아 다음달 열린 시장선거에서 승리한 뒤 3선에 성공, 자살 당일까지 최장수 서울시장 기록을 늘려가던 중이었다. 2017년에는 대선 출마를 위한 더불어민주당 후보경선 도중 포기했다.
‘일본 전쟁범죄 처벌, 지금도 가능한가’(1993년), ‘동경전범재판, 그 능욕과 망각의 역사’(1994년), ‘도쿄역사여성법정 참가기’(2000년) 등 여러 편의 논문과 ‘일본의 전쟁범죄연구’(1995년), ‘NGO-시민의 힘이 세상을 바꾼다’(1999년), ‘성공하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습관’(2002년), ‘아름다운 세상의 조건’(2010년) 등 여러 권의 저서를 냈다.
상훈: 1998년 한국여성단체연합 제10회 올해의 여성운동상, 2002년 서울지방변호사회 공익봉사상, 2003년 시민의 신문 올해의 활동가상, 2003년 희망 이웃돕기 유공자 국민포장, 2006년 제10회 만해대상 실천부문, 2006년 필리핀 막사이사이상 공공봉사부문, 2007년 제21회 단재상 학술부문, 2009년 제15회 불교인권상, 2014년 2014 매니페스토 약속대상 선거공약분야 최우수상 등.
▶박원순 논란: 서울시장 직무수행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리지만 인권변호사 겸 시민운동가 박원순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가 압도적이(었)다. 지금은? 극명히 갈린다. 전직 여비서가 시장 집무실 옆 침실에서, 또 퇴근 뒤에는 텔레그램 등을 통해서, 박원순으로부터 4년간 지속적으로 성추행을 당했다고 주장하며 경찰에 8일 고소장을 접수하고 이튿날 새벽까지 조사를 받았다. 지금까지 알려진 피해내용을 보면 “이 박원순이 그 박원순인가” 의심하게 만드는 언행이 넘쳐난다. 박 시장이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9일 돌연 출근하지 않은 채 행방을 감춘 뒤 10일 0시 직후 북악산에서 숨진 채 발견됨에 따라 고소건은 공소권 없음으로 처리됐다.
그러나 세간의 의혹까지 피할 수는 없게 됐다.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은 박원순의 성추행은 확인된 사실이 아니라 일방적 주장이라고 선을 그으려 한다. 물론 좌파진영에도 민망함 내지 못마땅함(정의당 유호정 의원과 장혜영 의원 등 공개적 조문거부 입장 발표)을 감추지 못하는 이들이 있기는 하다. 우파진영은 그를 겉다르고 속다른 변태적 위선자로 규정하고, 진실규명 기회마저 자살로 덮어버린 그의 장례를 서울시정 사상최초로 수억원의 혈세를 낭비해가며 서울시장(葬)으로 치르는 게 말이 되느냐고 맹폭한다. 너무 맑고 바르게 사신 분이라는 등 정치적 동지들의 발언, 더불어민주당이 박 시장의 뜻을 따르겠다며 곳곳에 내건 추모배너들, 바보 박원순 잘가요 주님께서 너그러이 안아주실테니(광주 인화학교 성폭력을 폭로한 ‘도가니’의 작가 공지영)라거나 아미타불이 함께 하시길 발원한다(자승 전 조계종 총무원장) 등 발언이 이어질 때마다 비판론도 수위를 높여갔다(이순신이 관노와 잠자리를 같이했다고 이순신을 비판할 수 있느냐고 응수한 옹호론자는 비판이 빗발치자 자신의 글을 삭제했다). 모두에게 감사하고 모두에게 미안하다며 “모두 안녕”이라고 쓴 짤막한 유서에서, "오직 고통밖에 주지못한 가족에게 내내 미안하다"면서도 '정작 그 여비서'에게는 미안하다 말 한마디 없었던 것 또한 도마에 올랐다. 게다가 "화장해서 부모님 산소에 뿌려달라"고 한 대목을 두고 과거 박 시장이 한 장기기증 서약은 지켜진 것이냐는 질문까지 있었다.
아들과 딸을 둘러싼 의혹도 소환됐다. 영국에 유학중인 아들(박주신)의 소재지 불명을 이유로 그의 병역의혹 재판이 수년째 중단된 가운데 이번에 그가 귀국하자 한쪽에서는 신체검사를 다시 받으라는 등 요구가 나오고 다른 한쪽에서는 유족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감싸는 말싸움이 벌어졌다. 딸(박다인)이 13일 장례식에서 유족대표 인사를 통해 한 “정말 특별한 조문행렬이었다. 아버지가 누구보다 기뻐했을 것...아버지에게 시민과 시민의 삶은 꼭 지켜내야만 하는 것...아버지에겐 언제나 시민 한명 한명이 소중...항상 시민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결정에 따르던 시장이셨다”는 등 발언이 전해지자 “그런 놈이 그래 딸 같은 여비서를...” 같은 야유와 비판이 쏟아졌고 내친김에 서울대 역사상 최초로 미대에서 법대로 옮긴 딸 본인의 ‘아주 특별한 전과’를 둘러싼 의혹도 다시 들춰졌다.
◆불교계 유명 승려들 조문: 조계종 홍보국은 총무원장 원행 스님을 비롯해 포교원장 지홍 스님, 총무부장 금곡 스님, 중앙종무기관 부실장스님들이 10일 서울대병원을 찾아 고인의 극락왕생을 발원했다고 발표했다. 불교신문은 자승 전 총무원장 등 30여명이 11일 박 시장 빈소를 찾아 조문했다고 보도했다. 특히 자승 스님은 추모발원문을 통해 “박원순 시장님은 항상 낮은 자리에서 인권, 행복, 희망과 용기의 등불...시민을 위했던 것처럼 늘 아미타부처님과 함께 하길 축원”했다고 보도됐다. 박 시장이 고교시절 불교클럽 활동부터 조명하며 그를 참불자로 기리는 기사도 있었다. 공교롭게도 무슨무슨 원장 등 돈과 여자 문제로 시비의 대상이 됐던 승려들의 말이 많이 인용됐다.
이들은 기회가 있을 때면 고려시대 항몽투쟁, 조선시대 임진왜란 정유재란 당시 승병활동 등을 거론하며 호국불교 전통을 내외에 자랑했던 승려들이다. 이들과 조계종 집행부는 올해 코로나19 사태를 맞아서도 불자들에게 호국불교전통을 상기시키며 국난극복 기도정진을 권장했다.지금도 진행중이다. 코로나방역을 위해 수고한 이들에게 안식을 위한 무료 템플스테이(종교불문)를 제공키로 해 박수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전의 영웅 백선엽 장군 빈소를 찾아 조문하거나 추모발언을 했다는 보도는 13일 현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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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