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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 당시 부처님도량 사수 불보살들

2020-06-25 (목) 정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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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 당시 부처님도량 사수 불보살들
크로아티아(Croatia)가 2018년 러 시아월드컵 축구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하기 전까지 지구촌에 그런 나 라가 있는지조차 모르는 이들이 적 지 않았을 것이다. 크로아티아는 지 중해 연안 발칸반도 서쪽에 자리한 조그만 나라다. 인구라야 서울의 절 반도 안되는 420만명 남짓, 면적은 한국의 절반 조금 넘는 5만6천여평 방km에 불과하지만 이 나라는, 특히 두브로브니크라는 해안도시는 거리 마다 집집마다 문화유산이라 할 만 큼 독특한 풍광과 유서깊은 건축양 식을 자랑한다. 이 나라가 유고연방 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날이 공교 롭게도 1991년 6월25일이다.

오늘은 6월25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첫‘ 세계급 열전’이라는 한국전 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날이다. 70 년 전 오늘부터 3년1개월간 남북한 전역이 쑥대밭이 됐듯이 크로아티나 는 29년 전 오늘 독립선언 그날부터 몇 년 간 독립을 저지하려는 막강한 연방군(실제로는 주로 세르비아군) 의 포화에 시달려야 했다. 쌍방간 전 쟁이라기보다 힘센 놈의 일방적 약 자 손보기(연방측 논리를 존중하자 면 가장의 가출자녀 혼내기) 같은 꼴 로 흐르던 충돌양상은 문화유산의 보고 두브로브니크에 대한 무차별 공격이 시작되면서 확 바뀌었다. 세 계의 지성인들 문화인들이 들고일어 났다. 세계여론이 움직였다. 미국 등 서방세계가 개입했다. 연방군은 물러 날 수밖에 없었다. 두브로브니크는 포격의 상흔까지‘ 대체로 그대로’ 보 존한 채 지금껏 세계적 관광지로 사 랑받고 있다.

미국 영국 등 자유진영과 소련 중 국 등 공산진영이 자존심을 건 승부 를 벌인 한국전에서, 군인과 민간인 합쳐 수백만명이 죽거나 다치거나 실종되거나 납치되거나 한 한국전에 서, 문화재가 문화재 대접을 받는다 는 건 아무래도 무리였다. 유럽이냐 아시아냐 하는 건 별개로 치더라도, 미소 양극체제에서 일어난 1950년대 한국전과 사실상 미국 독주체제였던 1990년대 크로아티아전 상황은 사 뭇 달랐다. 게다가 한반도를 비롯한 한민족 강역에서 신라대 황룡사니 뭐니 기념비적 문화재들 중 상당수 가 고려시대 몽골군 침입 때나 조선 시대 왜군 침입 때 이미 불타거나 부 서지거나 관리소홀로 그냥 흐지부지 되거나 했다, 외적의 표적을 면한 깊 은 산 속 사찰정도가 살아남았을 뿐.


공중전이 본격화된 한국전에서는 그런 사찰들도 더 이상 안전지대일 수 없었다. 오대산 월정사 등 많은 사 찰들이 사라졌다. 대개는 적군에 의 해서가 아니었다. 승리를 자신한 그 들은 전쟁이 끝나면 자기들 몫이 될 자산을 굳이 작살낼 이유가 별로 없 었다. 적군이나 빨치산의 근거지가 될 것을 우려한 국군의 결정으로 미 리 정리된 산중사찰들이 많았다. 이 른바 청야(淸野)작전의 일환이다. 그 런 가운데,‘ 목숨을 건 전쟁’ 와중에 ‘목숨을 걸고 부처님 도량을 지킨’ 불 보살들이 있었다. 한암 스님, 김영환 장군, 차일혁 경무관이 대표적이다.

경허 스님, 만공 스님, 수월 스님 과 함께 근세 한국불교에 선풍을 중 흥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한암 스님 (1876년~1951년)은 1951년 초 1.4후 퇴 당시 오대산 상원사에 머물던 중 월정사를 소각한 국군이 상원사마 저 태우기 위해 들이닥치자 법당에 좌정한 뒤“ 내 몸을 함께 태워 부처 님께 공양하겠다”고 버텨 상원사를 지켜냈다. 소각작전을 지휘하러 갔던 국군장교 역시 불자였는지 모르지만 결연한 스님의 태도에 더는 어쩌지 못한 채 부하들에게 상원사 곳곳 문 짝만 떼어내 태우게 한 뒤 물러났다 고 한다.

김영환 장군(1921년~1954년)은 대 한민국 공군의 창설주역 중 한 명으 로 한국전 당시 공비토벌을 위해 가 야산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거 부해 세계문화유산 해인사와 팔만대 장경을 살린 주인공이다. 작전 당시 편대장이었던 김 장군은 편대원들에 게 “폭탄과 로케트탄을 사용하지 말 라...기관총만으로 사찰주변의 능선을 소사 공격하라”면서 해인사 뒤쪽 능 선에만 폭탄과 로케트탄 몇 개를 투 하했다가 작전을 총지휘한 미공군 고 문단으로부터 “사찰이 국가보다 더 중요하냐”는 등 힐책을 받자“ 사찰이 국가보다 중요하지 않지만 공비보다 는 사찰이 중요하다...그 사찰에는 7백 년을 내려온 우리민족정신이 어린 문 화재가 있다”고 응수했다 한다.

독립군 출신 차일혁 경무관(1920 년~1958년)은 지리산 공비 토벌대장 으로 유명하다. 1951년 5월, 전북 주 둔 8사단과 군경합동 회의에서 녹음 기인 여름에 빨치산 소굴이 될 만한 사찰들을 소각하라는 명령이 내려졌 다. 당시 토벌대 18대대장이었던 그 는 이를 “공비들의 은신처를 없애고 관측과 사격을 용이하게 하자는 것” 으로 ‘일부러 축소해석’하고 화엄사 의 경우 문짝만 뜯어내어 소각했다. 천은사 쌍계사 선운사 등 다른 유서 깊은 사찰들도 큰 화마를 피할 수 있었다. 때문에 그는 반복적인 명령 불이행으로 징계까지 받았지만 사후 53년만인 2011월 총경에서 경무관 으로 추서됐다. 그 이전 2008년에 문 화체육관광부는 그에게 보관문화훈 장을 서훈했다

<정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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