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처녀 전사의 화형재판…고뇌 연기·경이로운 연출

2020-04-27 (월) 박흥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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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보는 고전 영화 ‘잔 다크의 수난’ (The Passion of Joan of Arc)

처녀 전사의 화형재판…고뇌 연기·경이로운 연출

잔 다크는 끝까지 신의 소명과 믿음을 지키다가 화형에 처해진다. 잔 다크 역의 르네 잔 팔코네티의 고뇌하는 얼굴.

‘뱀피르’(Vampyr·1932), ‘분노의 날’(Day of Wrath·1934) 및 ‘거트루드’(Gertrud·1964) 등 심오하고 영적이며 종교적인 작품을 만든 덴마크의 위대한 감독 칼 테오도어 드라이어가 연출하고 프랑스의 연극배우이자 영화배우인 르네 잔 팔코네티가 프랑스의 처녀 전사 잔 다크로 나오는 1928년 작 무성영화다.

보는 사람의 영혼을 고양시키는 선험적이요 완벽한 형식미를 갖춘 기념비적 작품이자 신비주의를 영상으로 구체화한 걸작으로 순교자 잔 다크가 스크린에 현신한 감동을 체험케 한다. 특히 이 영화는 1994년에 작곡가 리처드 아인혼이 합창과 앙상블 악기를 위해 작곡한 오라토리오 ‘빛의 음성’의 연주와 함께 보면 지극한 영적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오라토리오의 대사는 다 잔 다크에 의해 노래 불려진다.

오를레앙의 처녀 잔 다크(1412-1431)에 대한 프랑스 가톨릭 신부들의 마녀재판 기록을 바탕으로 재판과정과 재판 끝에 있은 잔 다크에 대한 화형을 치밀하게 재구성한 작품으로 드라이어의 철두철미한 연출과 팔코네티의 심오한 연기 그리고 루돌프 마테의 엄격한 촬영 등이 다 획기적이요 경이롭다.


특히 고뇌하는 잔 다크의 얼굴이 자주 클로즈업으로 화면을 가득히 메우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 무식한 촌색시 성인의 고뇌를 함께 느끼도록 만든다. 마테는 잔 다크와 그를 심문하는 신부들의 얼굴과 머리뿐 아니라 이들의 육신에도 근접해 관객으로 하여금 그들과 같은 현장에 있는 사실감을 극대화한다.

마테의 촬영은 투명하면서 간결하고 또 정직한데 인물들 외에도 재판이 열리는 수도원의 백색 내부와 외부를 비롯해 장식 없는 무대를 꾸미면서 잔 다크와 신부들 간의 치열한 영적 대결을 강렬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그의 카메라는 잔 다크의 발가벗은 영혼을 있는 그대로 퍼내다시피 포착하고 있다.

‘잔 다크의 수난’은 화면구성이 과감한 당시만 해도 형식미가 실험적인 작품으로 인물들이 말을 하는 입술의 움직임과 제스처가 마치 무대의 무언극을 보는 느낌을 주는데 진행이 순례자의 걸음처럼 매우 느려 순간순간이 고뇌로 연결되면서 서서히 감정의 결을 쌓아가다가 마지막에 깊은 감동으로 승화한다.

영혼의 육체의 삶에 대한 승리를 그린 대담무쌍한 영적 드라마로 머리를 삭발당한 팔코네티의 체념과 고뇌 그리고 불굴의 정신과 자비로운 부드러움 및 영적 희열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면서 떠도는 얼굴 표정은 한번 보면 결코 잊지 못할 숭고한 표정이다. 이 영화는 팔코네티의 유일한 주연 영화다.

드라이어는 배우들의 화장을 허락하지 않고 조명을 이용해 인물들의 모습을 거의 괴물들처럼 기괴하게 과장하고 있다. 그런데 드라이어는 팔코네티에게 맨 무릎을 돌바닥에 짓눌러 진짜로 고통을 체험토록 하면서 이 장면을 반복해 찍었다는 설이 있다.

영국과 프랑스 간의 백년전쟁 중인 1431년 영국군에게 포로가 된 잔 다크가 프랑스의 루앙으로 후송돼 영국에 충성하는 프랑스의 가톨릭 신부들에 의해 종교재판을 받는다. 신부들은 신의 소명을 받아 영국군을 물리치기 위해 출전했다는 양치기 잔 다크의 믿음을 꺾으려고 하나 잔 다크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결국 화형을 당한다. 이 영화가 처음 상영됐을 때 잔 다크의 처형장면을 본 관객들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박흥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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