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로나19 대응 비상조치…연준, 금융위기 때 썼던 카드 다시 꺼내
▶ ECB 등 6개 중앙은행, 달러 유동성 강화…日 ETF 매입 확대·中 지준율 인하
“풍부한 유동성 공급, 가계와 기업에 여신을 적극 지원하라는 메시지”
제롬 파월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AP=연합뉴스]
전 세계 통화·금융당국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에 대응해 '유동성 확대 공조'를 본격화했다.
코로나19 사태의 경제적 충격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 버금간다는 전 세계적인 위기의식이 반영된 것이다.
가장 파격적인 카드를 꺼내든 곳은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다.
기준금리를 제로금리(0%) 수준으로 떨어뜨리고, 장기유동성을 대량으로 공급하는 양적완화(QE) 프로그램을 사실상 재가동했다. 각종 신용완화 조치들도 함께 제시했다.
일요일인 15일 오후 예정에 없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표결을 거친 결과다.
비슷한 시각, 유럽중앙은행(ECB)을 비롯한 주요국 중앙은행들도 달러화 유동성을 강화하는 조치를 내놨다.
금융위기 당시의 '비상 모드'를 떠올리게 하는 복합적인 공조 조치들이 한꺼번에 나온 것이다.
일주일 거래를 시작하는 아시아 증시의 개장을 불과 서너시간 앞두고 '복합처방전'을 내놓음으로써 글로벌 증시의 연쇄적인 폭락세를 차단하겠다는 포석으로 해석된다.
◇ 미국 연준, 5년여만에 다시 '제로금리'
연준 기준금리인 연방기금금리(FF)는 기존 1.00%∼1.25%에서 0.00%∼0.25%로 무려 1.00%포인트 내려갔다.
코로나19 사태로 2주새 두차례나 '깜짝 인하'를 단행한 것이다. 앞서 연준은 지난 3일 기준금리를 0.5%포인트 내린 바 있다.
그만큼 코로나19 사태를 엄중하게 보고 두 번째 긴급 처방에 나선 것이다.
연준은 성명에서도 "경제 데이터는 미 경제가 도전적 시기에 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면서 "코로나바이러스의 영향이 단기적으로 경제활동을 누르고 있으며, 경제 전망에 위험이 되고 있다"고 위기 인식을 드러냈다.
이로써 기준금리는 2015년 12월 이전의 제로금리로 돌아갔다.
금융위기 당시인 2008년 12월 0.00∼0.25%로 내려간 기준금리는 7년간 제로 수준에서 유지됐다.
연준은 2015년 12월 금리 인상에 시동을 걸었고 2016년 1차례, 2017년 3차례, 2018년 4차례 등 모두 9차례 금리 인상을 단행했다.
연준은 글로벌 경기 둔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한다는 '보험성 인하'라는 논리를 내세워 지난해 7월부터 금리를 세 차례 연속으로 총 0.75%포인트 인하했다.
이후로는 경제 상황을 관망(wait-and-see)하겠다는 동결 기조를 유지했지만 최근 코로나19 사태가 금융위기급 충격을 가할 것으로 우려되자, 신속하게 완화 기조로 돌아선 것이다.
◇ 미, '4차 양적완화' 돌입…850조원 쏟아붓는다
무엇보다 주목되는 카드는 연준의 '4차 양적완화'다. 국채 매입 등을 통해 시장에 유동성을 직접 공급하는 정책이다.
쉽게 말해 '기축통화국'의 무한한 발권력을 이용해 달러를 찍어내 시장에 쏟아붓는 개념이다.
연준은 7천억달러(약 850조원) 규모의 유동성을 공급한다고 발표했다. 국채 5천억 달러, 주택저당증권(MBS) 2천억달러 등이다.
양적완화 프로그램의 핵심 보유자산인 국채와 MBS를 다시 사들이겠다는 것이다.
제로금리와 양적완화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연준이 사용한 양대 카드였다.
연준은 지난 2008년 말부터 국채 3천억달러, MBS 1조2천500억달러를 매입한 것을 시작으로 양적완화에 시동을 걸었다.
2010∼2011년에는 국채 6천억달러어치를 사들였고, 2013∼2014년에는 매달 국채 450억달러와 MBS 400억달러를 매입하는 3차 양적완화를 진행했다.
연준은 2015년부터는 과도한 유동성을 흡수하는 양적긴축(QT) 정책으로 돌아섰지만, 충분히 유동성을 줄이지도 못한 상황에서 또다시 돈 풀기에 돌입하게 됐다.
현실적으로 '제로금리'에선 추가적인 인하 여력이 없다는 점에서 양적완화는 당분간 코로나19 대응 통화정책의 키워드가 될 것으로 보인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AP=연합뉴스]
◇ 각국 중앙은행 '코로나19 대응공조' 본격화
주요국 중앙은행의 적극적인 공조도 금융위기 당시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ECB는 이날 성명을 통해 달러의 유동성을 강화하기 위해 연준과 ECB, 영란은행, 일본은행, 캐나다중앙은행, 스위스 중앙은행이 스와프 금리를 0.25%포인트 인하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금리 인하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기존의 1주일 단위인 스와프 오퍼레이션에 부가적으로 84일 만기 오퍼레이션을 제공하기로 했다.
이런 조치는 달러 대출을 쉽게 하고 대출 기한을 늘리는 것으로, 기축통화인 달러 유동성을 확보하기 위해 이뤄졌다.
ECB는 성명에서 "달러 자금 시장이 원활하게 작동할 수 있도록 새로운 가격과 만기 혜택을 적절한 기간 유지하겠다"고 밝혔다.
뉴질랜드 중앙은행(RBNZ)도 이날 기준금리를 1.00%에서 0.25%로 0.75%포인트 긴급 인하했다.
RBNZ는 "코로나19 발생 이후 글로벌 교역, 관광, 기업 및 소비자 지출이 크게 줄었다. 뉴질랜드 경제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이 상당하다"고 금리 인하의 배경을 설명했다.
홍콩의 중앙은행 역할을 하는 금융관리국도 기준금리를 0.86%로 즉각 낮춘다고 밝혔다. 기존 기준금리는 1.50%였다.
중국 중앙은행인 인민은행은 선별적 지급준비율 인하를 단행함으로써 5천500억위안(약 95조원) 규모의 유동성을 추가로 공급하는 정책을 내놨다.
앞서 캐나다 중앙은행(BOC)은 지난 13일 기준금리를 1.25%에서 0.75%로 0.5%포인트 인하했다. 지난 4일 기준금리를 1.75%에서 1.25%로 0.5%포인트 인하한 데 이어 9일 만에 추가로 내린 것이다.
일본은행은 코로나19 확산으로 동요하는 금융시장에 자금 공급을 늘리기 위해 상장지수펀드(ETF) 매입 목표액을 연간 6조엔에서 12조엔으로 늘리기로 했다. ETF 매입 확대는 주가지수 하락을 저지하고 금융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글로벌 중앙은행 공조에도 시장의 불안 심리는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코로나19발 경제 충격으로 빚어진 글로벌 공급망 붕괴와 소비 활동 위축 문제를 금리 인하를 통한 유동성 공급만으로는 해소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이번 연준 대책의 효과에 대해 시장이 의구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이번 코로나19 확산에 대한 불안감을 일반적인 통화정책으로만 진정시키기에는 한계가 있다"며 "연준이 일본은행처럼 양적질적완화(QQE) 정책을 채택하기를 금융시장에서는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존스트레이딩의 마이클 오루크 수석 시장 전략가는 "이런 조처는 중앙은행이 현재 우리가 처한 환경을 매우 두려워한다는 걸 보여준다"면서 "투자자들을 겁먹게 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 전방위 금융기관 신용지원…'가계·기업에 대출하라'
연준은 코로나19로 경제적 타격이 예상되는 가계와 기업의 신용을 지원하기 위한 조치들도 포괄적으로 제시했다.
우선 은행 지급준비율을 0%로 인하하고, 은행의 긴급대출 금리도 0.25%로 1.50%포인트 끌어내렸다. 이와 함께 은행 간 일중대출(intraday credit, 1일물 단기자금 공급)도 제공하도록 했다.
은행의 자본·유동성 규제도 완화하기로 했다. 금융위기 이후로 규제 한도를 웃도는 초과 자본·유동성을 쌓아두도록 했는데, 이를 적극적으로 가계·기업 여신에 사용하도록 허용하겠다는 것이다.
연준은 "가계와 기업체의 신용을 뒷받침하기 위한 조치들"이라고 설명했다.
기준금리를 '제로'로 끌어내리고 양적완화로 풍부한 유동성을 공급하는 만큼, 금융기관들도 적극적으로 가계와 기업의 여신을 지원하라는 메시지를 던진 셈이다.
시장에선 연준이 추가로 신용을 지원하는 방안을 내놓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나온다. 연준이 기업어음(CP)이나 회사채를 사들이는 방식으로 한계상황에 몰린 기업들을 지원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ECB는 이날 발표한 조치가 유동성 백스톱(안전장치) 역할을 해서 기업 및 가계의 신용 공급에 대한 압박을 완화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