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비망 (非望)

2020-01-29 (수) 박사농/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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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자·문예

지난 해 계절 만찬은 끝났다
동토의 숲 노목들만 남아
한파의 지열로 나신을 덥히고 있구나
뭇 생령들의 터전에 머물다 떠난 풍요의 계절이여
너희가 남긴 진언의 선나(禪那) 깨달음 있어
이쯤에서 불언지화(不言之化 )만상으로
내 존재사유 여백을 채우려 함이려니
품위있는 정신으로 강안에 나와 서서
멀리 깊은 산을 안고 돌아나오는 산곡수
맑은 흰 물줄기 빛을 바라본다
사시(四時) 몇 년을 넉넉히 살다가는 혼령들
석하(夕霞)에 깃드는 빈 붉은 산야를 굽어보네
알몸으로 돌아가야 할 죽음 피할 수 없지만
호의호식하며 오래 사는 악인의 사악한 위선을 보면서
본질보다 실존이 앞서가는 이 시대의 네오파시즘
자본의 굴레 속에서 많은 것을 잃고 여기까지 온
썩어가는 내 가슴 다둑이며 회억에 젖는다
고메르 창녀의 덫에 갇힌 파멸
온갖 노고의 번민과 고통이 허무요 허상인 것을
지난 날들의 불의(不義)에 빼앗긴 삶에서
흩어지는 정신과 허물어지는 몸을 지탱하며
서민의 피를 먹고 자라는 자본의 억새밭과
창녀집을 걸어나온 인고의 다짐이 몇 번 이었던가
모든 슬픈 서사는 이제 끝났다
허드슨 강 일곡수(一曲水)로 씻고 씻어내어
햇살 지나가는 빈 가지에 널어 말리고자 한다
빈자의 목숨도 청빈한 인생도 저 강물처럼 흘려서
긴 여정의 애환이 끝날 즈음 하류에 닻을 내리고
바닷물에 섞이어 소멸되는 혼백의 존재가
모두 한 곳으로 가지 않는가? 누가 알리오?
나 이제 이심(二心) 없는 프리마베라 여신의 가락 속에
남은 평온한 삶이 세속의 바람에 흩어지는 일 없기를
저승 빚 다 갚은 날 유유히 귀향하리라

* 선나(禪那):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진리의 직관
* 고메르: 구약 호세아서 (1, 2~3), 호세아의 아내
* 프리마베라(플로라):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꽃과 풍요와 봄의 여신

<박사농/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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