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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인칼럼] 근묵자흑(近墨者黑)

2020-01-23 (목) 박상근 목사/새크라멘토 한인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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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인간은 악과 대항하여 싸우다가 스스로 악한 존재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이리를 만난 목회자가 가슴에 깊이 새겨야 할 말이 아닌가 합니다. 이리를 대항해서 나의 감정을 드러내고 싸우다가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본인도 이리가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근묵자흑이란 말처럼 먹을 가까이 하면 내가 검게 더렵혀질 확률이 그만큼 높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목회자가 사역 중에 이리를 만나지 않을 확률은 인간이 우주선 없이 달에 갔다 올 확률보다 낮습니다. 불가능하다는 뜻이지요. 피할 수 없는 존재라면 어떻게 다루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가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지혜가 아니겠습니까? 지난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 해결책이겠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이겠습니까?

첫 번째 생각해볼 지혜는 이리를 바꾸려고 하지 말고 자신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인간관계의 많은 갈등이 자기 생각대로 남을 바꾸려는 데서 생겨납니다. 이리는 결코 목회자가 원하는 대로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어디 예수님이 실력이 모자라고 영성이 떨어져서 가룟 유다 같은 제자가 생겨났겠습니까? 애초에 바꿀 수가 없는 존재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십시오. 목회자의 개인적인 성향에 따라 반응은 다양하겠지만 이리를 바꾸는 것보다 나를 바꾸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지 않겠습니까? 물론 나 자신을 바꾸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내가 책임질 수 있는 부분과 그럴 수 없는 한계를 인정하십시오. 모든 것을 목회자가 다 책임질 수는 없습니다. 목회자도 불완전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자신의 감정에 따라 행동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이것은 평소에 훈련이 필요합니다. 목회자는 어쩔 수 없이 지도자의 십자가를 져야 할 운명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러려면 자기감정 컨트롤이 필수적입니다. 화나서 무섭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홧김에 무슨 짓인들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목회자가 감정을 따라 행동하면 이미 실패한 것입니다. 그러면 전후 사정에 관계없이 목회자가 감정을 표현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치명적인 공격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자기감정을 컨트롤하는 것이 자기 부정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목회자는 자기 안에 말씀에 대한 견고한 확신과 하나님 임재의 훈련이 정말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감정이 극단적으로 치우질 때 수류탄처럼 폭발할 수 있습니다. 피해자가 당연히 생깁니다.

주일 예배 후에 교인들 간의 갈등으로 다소 언쟁이 일어나자 화가 나신 목사님이 참지 못하고 친교실에서 성도에게 크게 소리 지르며 “당신 교회 나오지 마!”라고 소리치셨습니다. 그 후에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 갈등의 내용도 하찮은 것이었지만 목사님의 그 행동이 모든 이슈를 집어삼키게 되는 것입니다. 목사님을 지지하던 성도들까지 상처를 입습니다.

셋째, 이리를 묵상하지 마십시오. 이리의 존재가 힘든 것은 목사님들의 의식 속에 똬리를 틀고 앉기 때문입니다. 자꾸 생각이 나고 괘씸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꾸 묵상을 하면 결국은 나의 영성이 피해를 입습니다. 그러면 미워하게 되고 그 미움은 저주로 발전하기 마련입니다. 참 힘든 일이지만 목회자가 성도를 저주하면 스스로 함정을 파는 일입니다. 가능하면 무시하십시오.

<박상근 목사/새크라멘토 한인장로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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