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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영전야. 둘은 재회를 기약하며 손가락을 걸었을 것이다. 군인이 된 청년은 베트남에 파견된다. 한 팔을 잃는다. 무슨 사연이 있었을까. 처녀는 속세를 떠난다.
몇해 뒤 시골 오두막. ‘아는 형님’ 집에 내려간 글쓴이는 장대비를 긋기 위해 오두막에 찾아든 여승에게 참외를 건네주며 몇 마디 나누게 된다. 비에 젖은 스님의 교양미에 감전돼 글쓴이는 떠나려는 여승에게 절에 한번 놀러가고 싶다 말한다. 여승은 구경오라 말하고는 가늘어진 빗줄기 속에 총총히 홀로 떠난다.
며칠 뒤 저녁. 소낙비가 내린다. 오두막에 이번에는 외팔이 청년이 찾아든다. 묻는다, 근처에 절이 있는지 어떻게 가는지. 글쓴이는 직감한다, 여승을 찾는 거겠지. 여승에 대해 물어볼까 망설이다 글쓴이는 꾹 참는다, 그 신비로움 그대로 간직하고 싶어서.
이튿날 아침. 햇살이 부서진다. 참외밭 머리에서 남녀가 헤어진다. 외팔이 청년은 어디론가 떠나고 여승은 합장한 채 석상이 된다.
왕년에,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던 작가 유주현의 수필 ‘탈고(脫稿) 안될 전설’ 줄거리에 기자의 상상을 버무려 각색한 것이다. 어딘지 아려오는 여운, 그게 바로 여승 하면 얼른 드는 한생각 아닐까.
여승을 가리키는 고대인도 현지어는 비크슈니(bhiksuni) 또는 비쿠니(bhikkhuni)다. 발음이 비슷하게 옮긴 한자어가 비구니(比丘尼)다. 불교사상 최초 비구니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양모 겸 이모 마하파자파티다(친모 마하마야 왕비는 부처님 출산후 이레만에 세상을 떠난다). 깨달음을 얻은 뒤 천하를 주유하며 진리를 설파하던 석가모니 부처님이 고향에 들렀을 때 ‘기른 정 어머니’는 무려 500명의 석가족 여인들과 함께 출가를 허락받았다 한다. 비구니를 여자로 보고 접근한 느끼남이 그 시대에도 있었던 모양이다. 수바라는 이름의 비구니에게도 그런 남자가 졸졸졸 쫓아다녔다.한번은 길을 가로막았다. 수바는 이유는 물었다.남자는 “그대의 눈이 너무 아름다워서”라고 답했다. “이 눈은 구멍 속의 작은 육신일 뿐, 그대는 사라진 신기루 같은 꿈 속에서 황금나무 같은 있지도 않는 나를 찾고 있군요.” 수바는 즉석에서 자신의 눈을 뽑아 건네줬다 한다.
비구(남자 승려) 되는 것도 보통 아니지만 비구니 되는 건 더 어렵다. 지켜야 할 계율만 해도 비구보다 근 100개는 많다. 그러나 깨달음의 세계에 남녀가 따로 있으랴. 삼국시대에 불교를 받아들인 한민족의 땅에서도 비구니들이 생겨나고 또 생겨났다. 통일신라 초기에 활동한 여류시인 설요(薛瑤:660~693)는 열 다섯살 즈음에 아버지의 죽음 뒤 출가했다가 스무살 즈음에 “...이 청춘을 어찌 하랴”는 시 반속요(返俗謠) 한 수를 남기고 환속했다 한다.
남녀차별이 유난히 심했던 조선시대에도 끊어질 듯 이어져온 한국불교 비구니의 명맥은 오늘날 명성 스님을 만나면서 대끊김을 더는 걱정 안해도 될 만큼 내적 외적 기반이 튼실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제하 1930년 경북 상주 태생인 명성 스님은 1948년 강릉여고를 졸업하고 교사로 일했다. 남자라도 학교 문턱을 넘어보지 못한 이가 숱했던 그 시절에 그 만큼 배우고 안정된 직업을 가졌던 그는 어찌하여 머리를 깎게 됐을까.
몇해 전 스님의 불교방송 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어려서부터 위인전 성현전을 즐겨 읽어 위인을 길러내는 선망을 안고 교육자가 됐는데 곁들여 불교서적도 많이 읽었다 한다. 또 일본인이 쓴 ‘생명의 실상’이란 21권짜리 전집을 통독했다 한다. 딱히 말은 안했어도 피비린내 진동하는 동족상잔의 한국전을 겪은 것 또한 그의 출가에-최소한 불심에-적지 않은 영향을 줬으리라. 그는 한국전이 한창이던 1952년 해인사에서 출가했다. 그런데 스님의 회고는 의외로 싱겁다. 은사 스님의 권유로 자의반 타의반 출가했다. 게다가 거창한 권유도 아니다. 너는 출가수행이 맞겠다, 내가 설마 좋지 않은 걸 권하겠느냐, 뭐 이런 식이었다 한다.
출가후 스님은 공부와 함께 공양주로 부전(副殿, 주로 염불과 의식을 담당하는 스님)으로 1인3역을 하면서 정진을 거듭해 두각을 나타냈다. 1958년에 당대의 대강백 성능 스님으로부터 좌복과 함께 전강(傳講, 스승이 제자에게 교학敎學을 이어주는 것)을 받은 것, 본공 스님이 1965년 입적할 때 스승 만공 스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죽비와 주장자를 명성 스님에게 물려준 것(명성 스님은 지금껏 그 죽비와 주장자를 사용한다) 등이 숱한 증거들 중 일부다.
명성 스님을 더욱 보배롭게 만드는 건 뭐니뭐니 해도 운문사를 세계적 비구니도량으로, 운문승가대학을 세계적 비구니교육기관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대구 경주 밀양 등지와 접한 청도는 신라대 화랑도의 발상지로, 1968년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시작된 농어촌근대화 새마을운동의 시발지로, 또 전통적 볼거리 소싸움축제로 유명한 곳이다. 운문사는 거기서도 경주쪽에 가까운, 호랑이가 산다 하여 호거산이요 구름이 머문다 하여 운문산이라는 산에 터잡고 있다. 신라에 불교가 전래된지 얼마 안된 진흥왕 21년(560년)에 창건돼 역사는 유구했으나 법당과 요사채 등 몇채에 불과했던 운문사는 명성 스님이 1977년 주지 겸 학장으로 취임해 20년3개월간 소임을 맡는 동안 법당 등 10여채가 개보수되고 전각 요사채 등 40채가 신축됐다. 그 기간에 길러낸 제자 비구니들만 1,700명을 넘는다. 6,000명을 헤아리는 한국불교 비구니 중 근 셋 중 한명은 그의 제자인 셈이다. 그가 운문승가대 강사소임을 맡은 1970년부터 치면, 게다가 그가 이곳저곳 돌며 강의한 데 따른 몫까지 치면 족히 둘 중 한명은 그의 제자일 것이다.
가르치는 한편으로 그는 배움에도 열중해 동국대에서 불교학(1974년) 철학(1998년) 학위를 취득했다. 제4회 포교대상(1991년), 스리랑카 사사나 키르티 스리 공로상(2001년), UN 제정 ‘탁월한 여성불자상’ 등 많은 상을 받았고, 구사론대강(1994년), 법문집 ‘즉사이진, 매사에 진실하라’(2010년), 서간집 ‘꽃의 웃음처럼 새의 눈물처럼’(2010년), 평전 ‘후박꽃 향기’(2010년) 등 여러권의 책을 썼다. 2003년부터 최근까지 전국비구니회 회장을 맡아 비구니 위상을 정립하고 신장하는 데도 앞장섰다.
비단 비구니계뿐 아니라 한국불교 비구계 비구니계를 아우르는 큰스승으로 존경받는 가운데 구순이 된 명성 스님의 논문 법문 강의록 기고문 등을 망라한 20권짜리 ‘법계명성전집’이 얼마 전에 출간됐다(사진). 한국불교 역사상 최초의 비구니 전집이다. 11일에는 운문사 대웅보전에서 각계 하객들과 제자들이 모인 가운데 명성전집 봉정식이 봉행됐다. 최근에도 포르투갈 등 유럽각국 여행을 다녀오고 한 시간이 넘는 기자간담회에서 유머를 잃지 않고 속내를 진솔하게 털어놓을 정도로 ‘여전한 청춘’인 명성 스님의 90 평생에서, 그의 모든 것을 담은 20권 전집에서, 우리 모두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될 단 한마디를 고르라면 즉사이진(卽事而眞)일 것이다. 사사물물(事事物物 ) 그대로 모두 다 진리이니 매사에 진실하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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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수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