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등] 별
2019-11-28 (목)
동진 스님 / SAC 영화사 주지
요즘 사람들은 밤에 별을 더러 보는지 모르겠다. 영화사 뜨락엔 별이 많다. 겨울이면 일찍 밤이 오고 더욱 어두워서, 빛나는 별이 잘 보인다. 저 보석같이 빛나는 별빛이 가까이는 삼십여년, 혹은 지구와의 거리 차이에 따라, 몇 백, 몇 천,. 몇 억년 전의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별을 보고 있으나 별을 본 게 아니라고 해야 하나, 봤다고 해야 하나... 생각 자체가 부질 없다. 별 뿐만 아니라 우리는 아무것도 진실 그대로를 보고 있지 못하다. 별을 별이라고 본다 해도, 이미 그것은 각자의 경험치에서 투영된 별일 뿐, 진실의 별과는 거리가 멀다. 세상에 대해 자기식대로 잘못보고 있으면서, 잘못보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걸 일러. ‘무명’이라고 한다. 우리가 망상 속에서 살고 있어, 세상에 대해 사실 그대로로 인지 못하니, 그걸 바로 알고 살자,는 것이 부처님의 연기 사상이다. 세상은 연기로만 존재할 뿐, 저 밖 어디,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나와 밖을 가르고, 나는 나고 밖은 밖이라고 믿고 살며, 절대로 이 고착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설사 이론적으론 ‘무아’다, 이해한다 해도, 그걸 사실이라고 믿진 않는다. 하지만 밖, 이란 게 무엇인가. 밖에 있는 공기를 내가 마셔서 살고 있는데, 어디부터 밖이고 어디부터 안인가. 코부터? 폐부터? 들어왔다 나간 것은? 나무가 없으면 먹는 사과도 없다. 사과를 키운, 땅 비, 흙, 바람... 어디부터 잘라, 나와 사과라고 경계 지을 것인가. 대승의 가르침은 ‘나 아닌 것이 없다’ 라는 것이다. 하나다. 하나이지만 차별로 보이는 것은 각자의 업이 달라서다. 각자의 삶에 별이 있는 이와 별 따윈 없는 이가 있는 것은 그 업의 문제이다. 선업은 선업을 부르고 푸른 것은 푸른 것을 다시 찾게 하며, 이가 박가를 다르게 벌려 놓는다. 하지만 손만을 떼어 너라 할 수 없고, 한국만 떼서 지구라고 할 수 없듯이, 모든 것은 서로 꽉 손잡고 벌어지는 하나의 세상이다. 그래서 세상엔 ‘남의 일’인 것은 없다. 잠시 화면에 비치는 정도로, 얼마나 그 진실을 알 것이냐만. 최루탄에 눈 못 뜨고, 등을 얻어맞고, 총을 쏘고 맞고 하는 이들의 심정을, 여기 멀리서 알 수도 없지만, 이 중에게는 저 먼 섬, 그 프로테스터라 불리는 무리들이 결코 낯설지 않다. 어느쪽이 옳고 그르다 관여 할 수도 없고, 관여할 만큼 전체를 알고 있지도 못하다. 그러면서 왜 이 중의 세상에는 그들이 아프게 있느냐, 는 것이다. 이런 심정을 80년대를 최루탄과 함께 청춘을 통과한 이들 만은 알 것이다. 그 업이 이 업을 부르는 것이다. 그 업이 없는 이들은 이것을 봐도 모른다. 이곳 사람들이 생명을 죽여서 감사의 날을 축하하는 그 뜻을, 내가 죽어도 모르듯이. 이 중에겐 프로테스터보다 이편이 더 낯선 세상이다. 별 만큼 많은 별별 사람들. 그 많은 우리는 잔인할 만큼 서로를 안 본다. 마치 어둠 속 사물들처럼. 그 막막함을 요즘 자주 별에게 묻는다. 때론 그 별이 반짝, 답을 해주기도 한다. 우리가 빛을 내는 이상, 언젠가 누구든, 반드시 본다, 라고. 그리고 그 빛을 보고 감동하고 살아갈 힘을 얻는 이도 있다고. 모든 별이, 태양조차도, 과거로부터 날아와 현재에 그 빛을 던지듯, 우리가 지속적으로 빛을 내는 한, 우리의 오늘은 늘 밝으리라고. 오늘 새삼 별에. 태양에, 하늘에, 땅에, 모든 생명에, 나와 연결된 모든 밝은, 인연에게 너무 감사하다. 그들에게 무엇으로 갚을까, 갚고는 있는가, 고심하는, 감사의 계절이다.
<동진 스님 / SAC 영화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