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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인칼럼] 이리 떼 속의 양

2019-11-21 (목) 박상근 목사/ 새크라멘토 한인장로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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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앙은 자칫하면 하나의 허상에 지나지 않을 위험성이 상당합니다. 다양한 종교적 행위와 그 많은 제자 훈련이 무의미한 구호처럼 전락할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과연 생명력 있는 기독교 신앙이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절망스러운 질문을 피할 수 없는 것이 교회의 현 주소일지도 모릅니다. 불편하지만 이런 고민들은 벌써부터 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깊은 반성이 있습니다.

그 많은 예배와 찬양과 기도와 구제와 선교는 정말 제대로 그 의미를 갖고 있는가? 이제 겨우 63세를 바라보는 인생의 풋내기가, 목회 경력 겨우 30여년 된 초보자 입장에서 고민해 보고 감히 그 해결책을 찾기에는 벅찬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복음과 너무나 괴리감을 느끼게 되는 기독교 신앙의 현주소는 너무나 많습니다. 이리 떼 속의 양은 그 대표적 개념이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말씀하신 주의사항입니다. 그런데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기도 쉽지 않지만 적용하기는 더더욱 어렵다는 것은 도처에서 증명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본질을 양으로 규정하셨습니다. 성경에서 양은 긍정적인 의미로 쓰일 때보다 부정적인 의미로 쓰일 때가 더 많습니다. 어리석고 고집이 센 인간의 본성을 말할 때 “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다”고 주님이 한탄하셨습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의미와 교훈적인 의미로 쓰일 때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어린 양으로 묘사한 것이나 오늘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양으로 표현한 것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아시다시피 양은 어떤 식으로든 공격용 무기는커녕 방어를 위한 신체구조도 갖고 있지 못한 불행한 동물입니다. 맹수가 공격할 때 다리가 짧아 뒷다리로 자신을 방어할 수도 없을뿐더러 빨리 도망갈 수도 없습니다. 귀가 어두워 다가오는 위험의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눈은 극도의 근시여서 바로 앞에 적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후각도 발달하지 못해 눈앞의 적도 구분하지 못합니다. 날카로운 이빨이라도 있어서 자신을 방어할 수 있으면 좋은데 그마저 풀이나 뜯기에 최적화되어 있어서 맹수가 공격해오면 먹이가 되어 죽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리는 잔인한 이빨과 명석한 두뇌와 예민한 후각과 날카로운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빨리 달리며 치고 빠지기에 딱 좋은 튼튼한 다리와 미세한 소리도 감지하는 뛰어난 청각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이리들 속으로 양이 보냄을 받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불문가지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무슨 의도로 양 같은 제자들을 이리 떼 속으로 보내신 것일까요?

예수의 제자들이 만나는 세상은 결코 녹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불신의 세상이 악하다는 것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에서는 그렇게 적용이 끝나지 않는다는데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제 짧은 63년의 신앙 경험을 통해 보면 우리는 교회 안에서 너무나 많은 이리들을 만납니다. 성도란 이름의, 집사, 권사란 이름의, 장로란 이름의 이리들을 만납니다. 심지어는 목사란 이름의 이리도 만날 수 있습니다. 현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인간들이 종교의 이름으로 저지르는 잔인한 공격성은 익히 알려져 있는 바와 같습니다. 그것은 어느 종교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만약 여러분이 목회자라면 장로란 이름의, 집사, 권사란 이름의 이리를 만났을 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실제로 어떻게 대처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평신도라면 이리 같은 목사를 만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현실에서 어떻게 대처하고 있습니까?

<박상근 목사/ 새크라멘토 한인장로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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