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사 문화

2019-11-20 (수) 김희우/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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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든 뉴욕을 떠나면서 만감이 교차한다. 일생을 방랑하다 정착한 곳이 뉴욕인가 싶었는데, 또다시 로체스터의 딸 곁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국제이사 7번 동안 뉴욕은 12년의 가장 오랜 세월을 보낸 곳이다. 다정한 교우, 문우, 동문들과의 이별을 예고하며, 이사를 준비하는 동안 잊지 못할 한편의 감동적인 기억이 떠오른다.

지구 반대편인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했을 때, 아르헨티나의 인플레이션은 물가 상승을 통제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러 카를로스 메넴 신정부 때엔 물가가 8배 가까이 오른 상태였다. 새 생활에 적응해야 하는 시점에서 경제난으로 마음이 주름져 있을 때, 무거운 마음을 환하게 바꾸어 주는 아름다운 새 이사문화를 접하게 되었다.
반들반들한 검정 대리석 길로 운치 있는 거리, 바리오 벨그라노 지역에 단풍이 아름답게 채색되기 시작할 무렵에 렌트 한 집으로 이사를 했다. 집안 구석 구석은 말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식탁위에 곱게 놓인 연분홍 빛 카드와 아르헨티나의 유명한 트라피체 말벡 (Trapiche Malbec) 와인이 한 눈에 들어왔다.

펜으로 정성스럽게 쓴 카드에는 이사 오신 분의 가족을 환영하며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정갈하게 정리된 냉장고에도 몇 병의 물병과 탄산수가 종류별로 가지런하게 놓여 있었다.


지구를 반 바퀴 돌아 생소한 땅에 도착했을 때,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섬세한 배려와 축복으로 나의 가슴은 행복감으로 그득 차올랐다. 마음속에 자리한 경제적인 고뇌도 일순 사라지고, 이국에서 첫 발을 내딛는 희망찬 출발점이 되어 주었다. 우리는 떠나는 분과는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였다.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을 선물해 주신 사랑이 충만한 분에게 감사했다.

뜻하지 않은 감동은 이제껏 수많은 국제이사를 했던 나의 생활 방식을 되돌아본 계기가 되었다. 외국으로 부쳐야 할 짐, 맡겨야 할 짐, 도네이션 할 짐 등, 일이 많다 보니 떠나는 날에는 정신없이 청소도 제대로 못하고 희뿌연 먼지도 남겨 놓은 채, 황급히 이사를 하는 일들이 비일비재 했다. 먼지를 쓸어 가면 복도 함께 가져 간다고 그대로 남기고 떠나라던 옛 어른들이 남겨 준 지혜의 말씀은, 아마도 힘들고 번거로운 이사의 불편함을 덜고자 하는 깊은 뜻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르헨티나의 마음을 적시는 따뜻한 감동을 받은 후에, 나의 이사 패턴이 많이 바뀌었다. 어디인가 고이 접혀져 있을 분홍빛 카드의 메시지가 전해주는 행복을, 나도 알지 못하는 누구에게 전하고 싶다. 이사하기 한 달 전부터는 집안 구석구석을 말끔히 치우고 이사 오시는 분이 불편하지 않도록 최소한의 배려를 하도록 노력하고 있다. 정든 집을 떠나며 예쁜 화분과 꽃봉투를 남겨 놓았다. 가족 모두의 건강과 아름다운 삶이 되시길 빈다는 사연도 함께.

<김희우/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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