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가을인가!

2019-11-06 (수) 이선희/ 시인.뉴욕시문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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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거리며 내리는 빗줄기는 나무의 의지와 상관없이, 마른 잎 새들을 습한 땅으로 밤새 끌어 내렸다. 피부에 스치는 쌀쌀한 바람에 집 떠난 제비들의 안부가 궁금해지는 아침이다.

해말간 아침과 마주하며 별달리 벌이가 될 만 한 일이 없어진 나는 다른 하나의 대체 벌이를 만들려한다. 그 것은 시간벌이를 하는 일이다. 아주 오랫동안을 알람소리로 시작되어 동동 거리며 치닫던 일꾼(?)에서 해방되었다. 그 지루한 고단함에서 풀려났으니 팡파르라도 울리며 조금은 느슨히 풀어져 쉬어도 좋으련만. 묶여 지낸 세월이 남겨준 후유증일까? 대책 없이 넓어진 하루의 공간이 쓸모없는 잡동사니로 메워지지나 않을까 여전히 안절부절이다. 이러한 내게 친구는 강박관념이라는 병명을 부쳐주었다. 그나마 주말이면 친구가 되어주던 그이도 일자리로 가버린 월요일 아침은 휭 하기가 그지없다. 예전처럼 반들반들 왁스로 광내며 집안 청소라도 하면 좋으련만 이조차 시간낭비로 치부되는 나의 계산법은 정말 친구의 말처럼 뭔가 몹쓸 정신병에 라도 걸린 것이 아닐까? 어쩌면 눈이 먼 듯 뵈지 않는 생의 막다른 골목을 걷는 노인의 전초 증세 일지도 모르리라.

그리도 연연 했던 제비새끼들도 실한 날개 활할 펴고 제 길 찾아 날아갔다. 넓게만 느껴지는 빈 둥지에 소외 되었던 일거리들을 주섬주섬 끄집어내며 시간벌이에 들어선다. 이민을 오며 접어버린 먹과 벼루와 붓, 시인이 되리라고 하나 둘 사 모아두었던 시집들을 들추며 컴퓨터 앞에 앉아본다. 집안일에 게으르다고, 나만의 일만 한다고 어느 누가 불평 하리오 이만큼 치 달려 왔는데....이제 제2의 사업을 벌인 듯 마음이 풋풋하다.


뒤돌아보니 고단한 일상이 목까지 꺽꺽 차올라 허덕이던 때가 있었다. 어느 날 퇴근길에 저녁꺼리 잔뜩 담은 샤핑백을 양손에 들고 마켓을 나오다 이웃 집 노부부를 만났다. 그들은 식사 후 간식꺼리를 고르려 나왔다 한다. 그 여유와 평안을 간절히 부러워했던 때가 있었다. 그때에 나는 어서 빨리 나의 시간도 뛰어지나 그들처럼 평안하기를 원했던 것 같다. 그때의 그 바람이 이제 내게 도래한 것이다. 동전의 양면성 같은 우리네 인생, 다만 어떤 길에 서 있을 지라도 굳게 견디며 또 충실히 또 달리리라.

내 삶의 의지가 되어 주던 나의 가장 소중함을 하루의 우선으로 책상위에 펼친다. 분주 했던 어제의 마음들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내 존재의 행세를 위해 동부서주 했던 것들도 먼지처럼 날아난다.

젖은 낙엽 위로 포근히 퍼져가는 해의 자유로움을 바라보며 다시 이어가는 내 생의 소중한 벌이. 창 틀 위로 하루해가 들며 날며 저물어 간다. 끝자락에 깔리는 고운 노을을 위함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선희/ 시인.뉴욕시문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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