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방곡곡 노포기행 - 남원 새집추어탕
창업주인 고모 가게 놀러왔다가 스무 살부터 일 돕기 시작
▶ 미꾸라지는 꼭 국내산 쓰고 육수는 다른 것 일절 안 넣어 숙회·튀김 등 다른 메뉴도 인기, 벽엔 유명 인사들 사인이 가득
“추어탕집 이을 사람 없어 60년 전통 끊길까 걱정 되죠”
남원 새집추어탕 창업주인 고 서삼례(왼쪽)씨와 서씨의 조카인 현 대표 서정심씨.
추어튀김과 각종 반찬이 곁들여져 식탁에 올려진 한 상 차림.
남원 새집추어탕 종업원이 소쿠리 안에 가득 담긴 미꾸라지들의 몸에 묻은 이물질과 냄새를 제거하기 위해 손질을 하고 있다.
익산시에서 설치한 추어탕거리 조형물. [익산시 제공]
가을은 추어탕의 계절이다. 겨울잠을 자기 위해 토실토실 살을 찌운 미꾸라지가 제철을 맞는다. 추어탕의 보양 효과는 예부터 널리 인정받아 왔다. 효능은 옛 의서에도 나온다. 동의보감에는 “성질이 온하고 맛이 달아 속을 보하고 설사를 멎게 한다”고 기록돼 있다. 중국 약학서 본초강목에도 “미꾸라지는 배를 덥히고 원기를 돋우며 양기에도 좋고 백발을 흑발로 변하게 한다”고 돼 있다.
실제 영양학적으로 단백질과 칼슘, 무기질이 풍부해 원기를 회복해 주는 데 제격이다. 이는 미꾸라지의 생태와 관련이 있다. 생명력이 강해 산소가 부족해도 진흙 속에서 유기물을 먹고 살아가는 미꾸라지는 겨울잠을 잔다. 이 때문에 가을에 충분한 영양을 몸에 비축한다. 겨울이 되기 전에 먹으면 그만이라고 해 이름에 가을 추(秋)자가 붙게 됐다.
전북 남원은 지리산과 섬진강을 끼고 있어 오래전부터 주변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재료로 추어탕을 만들어 먹었다. 찬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면 마을 사람들은 논의 물을 빼고 도랑을 쳐 겨울잠을 위해 논바닥 밑으로 기어 들어간 미꾸라지를 잡았다. 추어탕에 꼭 들어가는 시래기와 토란대 등 첨가 재료도 풍성했다. 이 덕분에 남원에서는 가을이면 집집마다 추어탕을 끓였다. 배고픈 시절 농부와 서민의 든든한 보양식이었다.
토속음식으로 사랑받던 남원 추어탕이 본격적으로 상업화로 이어진 것은 1950년대 말이다. 남원의 대표적 관광지인 광한루 주변에 추어탕 전문점들이 하나 둘 들어서면서다. 지금은 남원의 대표적 특화 거리가 됐다. 값싸고 맛 좋으며 영양 많은 추어탕이 광한루를 찾는 관광객과 시민의 사랑을 받으며 추어탕 집은 꾸준히 늘었고 현재는 30여곳이 성업 중이다. 남원시도 이 일대를 추어탕 거리로 이름 붙이고 명성을 이어가기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남원 추어탕의 시작은 천거동에 자리 잡은 새집추어탕이 원조 격이다. 1959년 남원에서 처음으로 추어탕을 끓여 팔기 시작했다. 고 서삼례씨가 창업했고 지금은 조카인 서정심(58)씨가 대표를 맡고 있다. 창업주의 후손이 없어 오랜 기간 함께 일하며 식당을 도와 준 서 대표가 물려받았다.
서 대표가 식당 일을 시작한 것은 스무 살 때부터다. 그는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남원에 놀러 왔다가 고모가 운영하던 식당에서 잠깐 일을 도운 것이 어느덧 39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했다. “고모가 저의 야무진 성격과 열정적인 모습을 보고 계산대 직원으로 일을 시켰고 이게 내 평생 직업이 됐어요.”
가게는 광한루 주차장 인근에서 시작한 뒤 50여년 전 100여m쯤 떨어진 곳으로 이전했다. 현재의 음식점 건물은 2004년에 기존의 낡은 건물을 철거하고 새로 신축했다. 확장 과정엔 우여곡절도 많았다고 한다. 서 대표는 “고모가 100여평 규모의 식당을 물려준 이후 20여년 동안 식당 에서 번 돈을 허투루 쓰지 않고 한 푼 두 푼 모아 주변 창고와 땅을 조금씩 사들였다”며 “현재 본관 건물이 만들어지기까지 눈물 콧물 많이 흘렸다”고 했다. 새집추어탕은 250석 규모의 3층 건물 본관과 바로 옆에 부속 건물인 휴게실, 40대를 주차할 수 있는 주차장 등을 갖춘 대형 식당으로 변모했다.
이 집은 처음엔 은어 요리를 파는 허름한 작은 포장마차로 시작했다. 인근에 요천이라 불렸던 하천에서 미꾸라지를 잡아 추어탕을 끓여 은어회를 대신했다. 이것이 새집추어탕의 시작이다. ‘새집’의 상호는 간밤에 집을 새로 짓고 지붕을 억새로 이었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서 대표는 상호에 대한 일화를 소개했다. 고모가 영업을 막 시작하던 50여년 전 어느 날 저녁 무렵 이름도 없는 무명 집에 전주에서 공무원 한 분이 귀한 손님을 모시고 왔는데 하필이면 그날따라 비가 많이 내려 천장에서 샌 빗물에 손님의 바짓가랑이가 모두 젖어 집으로 돌아간 일이 있었단다. “고모는 너무 미안한 마음에 그날 밤 억새로 지붕을 이었고, 이튿날 포장마차를 보고 놀란 이웃과 손님들이 간밤에 집이 새로 들어서고 억새로 지었다며 ‘새집’이라고 부른 게 가게명의 시작이었죠.”
건물에 들어서자 얼핏 보면 외관과 간판이 깨끗해 최근 개업한 식당으로 오해할 정도지만 그렇지 않다. 식당 안으로 들어서면 입구 한쪽 벽에 유명 인사들이 남기고 간 사인 흔적이 빼곡하다. 오래된 방송 출연 사진도 수십 장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 명성을 짐작할 수 있다. 서 대표는 “고모는 평생 동안 추어탕 만드는 데 혼신을 다해 맛을 지켜 왔다”며 “창업주의 원칙을 철저히 지키고 이어 오는 것이 손님들 사이에 입소문이 나 유명해진 것 같다”고 말했다.
새집추어탕은 명성에 걸맞게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창업주가 남긴 정신대로 된장이나 간장, 고추장 등 주방에서 쓰는 모든 장류는 직접 담가 사용한다. 탕과 숙회는 자연산 미꾸리와 미꾸라지만을 고집한다. 탕에 들어가는 시래기와 고추, 파 등 재료는 남원 운봉의 고랭지 채소밭을 사들여 직접 재배해 조달하고 있다. 채소밭은 공직생활을 하다 3년 전 퇴직한 남편이 관리하고 있다. 60년을 이어 오며 한결같은 맛을 내는 비법인 셈이다.
그는 음식을 만드는 데 몇 가지 원칙과 소신을 정해 놓고 실천한다. 국내산 재료를 쓰는 것은 기본이고 먼저 미꾸라지를 깨끗하게 씻어 내는 일이다. 이물질과 냄새를 말끔하게 제거한 뒤에야 솥에 안친다. 육수는 다른 것을 일절 섞지 않는다. 냄새를 잡고 고소한 맛을 내는 들깻가루를 넣는 게 전부다. 들깻가루 국물에 열무 시래기와 토란 줄기, 배추우거지 등을 골고루 섞어 가마솥에 푹 끓이는 방법으로 지금까지 맛을 이어오고 있다. 서 대표는 “평소 창업주는 장맛과 정성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는데 나 역시 그에 못지않게 지키고 있다”고 했다.
대표적인 음식으로는 추어탕을 비롯해 추어숙회, 미꾸라지튀김이 있다. 숙회는 미꾸라지에 갖은 양념을 해서 익힌 것이다. 창업주가 직접 개발했다. 탕과 함께 술안주로 추어볶음을 시작하다 안줏거리로 무엇을 만들까 고민 끝에 추어에 물을 자작자작하게 넣고 갖은 양념을 한 후 조려 제공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지금의 ‘추어숙회’다. 숙회는 특허를 받아 이 집의 대표 메뉴로 자리 잡았다.
서 대표도 단골 고객을 위해 추어를 이용한 튀김, 탕수, 전골 등 다양한 메뉴를 개발했고 추어깻잎튀김은 손님들에게 높은 호응을 얻고 있다. 숙회는 주로 술안주용으로 만든 음식이라면 튀김은 여성과 아이들을 위한 별미다. 깻잎에 말아서 튀겨 내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다. 예전엔 술 손님이 많아 숙회의 인기가 높았으나 지금은 가족단위 여행객들이 늘면서 튀김을 더 많이 찾는다고 한다.
그가 식당을 물려받아 대를 이어 오기까지 순탄치 만은 않았다. 창업주의 매사 철두철미하고 억센 성격 때문에 식당 일을 그만두고 싶은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서 대표는 “스무 살 꽃다운 나이에 온종일 식당에 얽매여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욕쟁이 고모 밑에서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하며 버티는 것이 쉽지 않았다”며 “이후에도 결혼했을 때와 엄마 손이 한참 필요할 때 아이들을 챙겨 주지 못해 일을 놓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창업주만큼이나 억척스럽고 부지런한 성격 덕에 지금까지 식당 문을 닫아 본 적이 없다. 이 집은 창업 때부터 365일 영업을 해 왔다. 서 대표는 “가까운 곳에 광한루와 지리산이 있어 사시사철 여행객과 등산객이 식당을 찾는다”며 “변함없이 식당을 찾아 주는 분들의 고마움 때문에 하루도 쉬지 않았고 명절 때도 고향 찾는 이들을 위해 365일 문을 열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서 대표에겐 고민도 있다. 추어탕 집을 이어 갈 후대가 불투명해서다. 막내딸이 시간 나면 잠시 일을 도운 적은 있지만 자녀들은 식당에 관심이 적고 서 대표도 자식들에게 물려줄 생각은 크지 않다. 그는 “남들보다 두 배나 많이 뛰고 일하면서 몸에 무리가 갔다”며 “10여년 전 무릎관절 손상으로 양쪽 모두 수술을 받았는데, 열심히 살려고 여기까지 왔지만 자식들에게 힘든 식당 일을 배우라고 권유하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그래도 그는 창업주의 뜻과 정신을 이어갈 생각이다. 서 대표는 “창업주는 한결같이 손님에게 인정을 베풀고 정성으로 맞이했다. 지역의 어려운 처지의 학생들을 위해서는 장학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일손을 놓은 후에도 무의탁 양로원을 사비로 운영하며 남몰래 선행을 베풀었다”며 “희생하고 봉사했던 창업주의 정신을 잊지 않고 남원의 전통 맛도 지켜 나가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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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글ㆍ사진 하태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