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지옥’을 통과했는데 샘솟는 이 행복감은 뭘까…

2019-05-24 (금) 정진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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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win Peaks (East) & Triplet Rocks (하)

▶ 안심하고 딛거나 잡기엔 부서지고 흘러내리는 바위들

‘지옥’을 통과했는데 샘솟는 이 행복감은 뭘까…

줌렌즈로 본 세 쌍둥이 바위.

‘지옥’을 통과했는데 샘솟는 이 행복감은 뭘까…

투혼의 작은 흔적.


‘지옥’을 통과했는데 샘솟는 이 행복감은 뭘까…

정상바위에 오른 우리 일행.



어쨌거나 대략 처음에는 조금씩 전진해 갈수록 목표지점에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와 진다는 점에서 나름대로는 사기도 오르고 위안도 되었으나, ‘전력투구 노심초사’하며 일정한 거리를 지나면서부터는, 이젠 반대로 이 험난한 곳을 다시 되돌아 나가야 할 여정이 길어진다는 점에서 되려 심란해 진다.

아마도 마지막일 Saddle(5850’)의 소나무 그늘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12:30). 잠시후 3~4층 높이는 족히 될듯한 암벽에 이른다. 피해갈 방법이 없다. 제이슨이 어렵게 찾아내어 Down받아 온 GPS Track도 여기가 끝이다. 나는 그 돌올한 암봉의 위세에 겁을 먹는다. “아, 우리도 이제는 더 가질 못하겠구나!” 그러나 제이슨이 “Class 4는 되겠네요.”라며 먼저 바위벽 앞으로 썩 나선다. 내 눈으론 거의 수직에 가까운 바위면을 양 손으로 더듬어 잡으며 한 발 한 발 딛어가며 위로 오른다. 참으로 대단한 용기이고 기량이다. 양쪽 가슴에 부착하고 다니는 Camera 와 GPS를 떼어 배낭에 넣고 제이슨의 동작을 따라 나도 이판사판의 결기로 뒤를 따라 올라간다. 막상 절벽에 바짝 붙어 그의 요령을 따르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다. 로저가 내 뒤를 따르고 써니가 우리에게 격려와 도움말을 주며 맨 밑에서 올라 온다.


나아가는 지점지점이나 구비구비의 특성을 다 세세히 기억할 수는 없으나, 이 산행의 전반적인 특징들은 대개 요약할 수 있다. 중심능선 자체도 수시로 삐쭉삐쭉 돌출되어 있어 가파른 내리막 오르막이 많고, 그렇기에 거의 모든 구간에서 시야가 매우 짧아 어느 쪽으로 나아가야 할지 가늠키가 어려우며, 쓰러진 큰 나무들이 빈번히 우리들의 나아감을 방해한다. 루트를 찾기가 더욱 어려운 곳에는 정작 Ducks가 없다. GPS Track도 좌충우돌 갈팡질팡이라 이런 경우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급경사진 비탈에 있는 바위나 돌들이 여차하면 그대로 굴러 내리고, 쉽게 부서져 갈라지는 바위들이 많아 결코 안심하고 바위나 돌들을 잡거나 딛을 수 없다. 능선의 고점은 주로 집채만한 큰 바위덩이들로 이어져 있어, 수시로 직진이 불가능한 단애(斷崖)이므로, 부득이 이 경우에는 좌우의 낮은 지점으로 내려서서 우회해야 한다. 그러나 이 과정이 대개는 아주 위태로운 벼랑이거나 아니면 Oak Tree, Manzanita, Buckthorn, Yucca 등이 철벽수비를 하고 있어, 지나갈 틈을 만드느라 여간 지체되고 곤욕을 치루어야 하는게 아니다.

어쨌거나 불과 3.2마일에 지나지 않는 이 Twin Peaks에서부터의 구간을 처처에서 천신만고의 분투를 벌이면서 전진에 전진을, 또 때로는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를, 거듭한 끝에 무려 7시간이 다 걸려서야 마침내 대망의 Triplet Rocks의 첫번째 바위에 올라선다.

가운데 바위가 조금 더 높다. 제이슨에 이어 로저가, 오르기가 다소 까다로운 정상바위에 거뜬히 오른다. 나와 써니는 그들이 늘어뜨린 로프를 잡고 안전하게 오른다. 아, 이제 여기가 대망의 Triplet Rocks 정상(6151’)이다! 감격에 겨운 나머지 서로가 서로를 포옹하며 서로의 짧고도 길었던 그간의 노고와 건투를 치하한다. 그만그만한 덩치의 세개의 바위중에서 가운데 바위가 키가 조금 더 높아 정상이 된다. 윗면의 넓이가 10평은 되어 보일만큼 크고 넓다. 아마도 먼 옛날에는 한 덩이의 바위였을 것이다.

평소 이곳 주변의 몇몇 산들 - Kratka Ridge, Smith Mountain, Mt. Islip, Waterman Mountain, Monrovia Peak - 에 오를 때마다 이 세 쌍둥이 바위들을 먼 발치로 바라보며 동경해 마지 않았었는데, 지금 내가 바로 그곳에 올라있다는 사실에 마냥 가슴이 벅차다. 나는 지금 감히, 볼 수는 있으나, 결코 접근을 허용치 않는 ‘3개의 몸뚱이를 지닌 괴물황소 Geryon’의 머리를 타고 앉은 불굴의 용사 Hercules가 되어 있다.

자, 이제 정상에 오른 벅찬 성취감을 가슴에 가득 담고 다시 저쪽 Twin Peaks와 Buckhorn Area 를 향해 안전하게 돌아가야 하는 일이 남아있다. 자칫하면 비를 만나거나 어둠에 갇힐 수 있고, 숱하게 오르고 내려야 하는 ‘형극의 길’이 온전히 그대로 남아있다. 더구나 이제는 고도 6151’ 의 이 세 쌍둥이 바위에서 고도 7761’가 되는 Twin Peaks 를 향한 오름길이 된다. Troy전쟁에 애써 승리하고 나서, 고국 Ithaca로의 귀향에만 10여년에 걸쳐 온갖 신산을 겪는 Odysseus가 떠 오르면서, 결혼 40주년을 맞는 기념으로 예약해둔 관광버스를 바로 내일 아침에 아내와 함께 탈 수 있을 지 은근히 걱정된다.

사실 이 Triplet Rocks를 향해 한 발 한 발 다가오는 중간 중간에, 이 길이 너무 험하니 하산할 때는 계속 동남쪽인 Bear Canyon이나 Smith Mountain쪽으로 내려가면 어떨까라는 의견들이 있었는데, 막상 이곳에 올라보니 그 쪽은 감히 엄두를 내볼 수 없을 정도로 극히 험악한 지형이다. 난감할 망정 그래도 왔던 루트를 되짚어 그대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어느 누구도 이의가 있을 수 없는, 고려의 여지가 없는 최선의 선택이다.

Twin Peaks(7761’)와 세 쌍둥이 바위(6151’)의 고도는 1610’의 차이가 있으므로 하산하는 과정이 실상으론 엄연히 하산이 아닌 등산이다. 3.2마일의 거리이므로 마일당 평균 500’를 오르는 것이니 전혀 가파른 것은 아니나, 중간에 있는 6개 이상의 험준한 봉우리를 넘는 과정에서 수시로 가외의 등산과 하산을 반복해야 하는 특성이 있고, 그 어느 곳도 만만한 데가 없고 보니, 그야 말로 ‘전도가 양양’하다.

불과 수시간 전에 한번 통과한 루트이니 돌아가는 편은 그래도 좀 익숙하여 시간이 꽤 덜 걸리려니 했는데, 결과는 그렇지 않다. 즉, 내려갈 때 6시간 53분, 되돌아 올 때 6시간 47분이 걸려 별반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불과 100m 남짓 거리의 긴 Gully구간을 예로 들자면, 내려갈 때 50분 내외, 되돌아 갈 때 70분 내외가 소요되기도 한 것이다.


이 3.2마일, 마의 구간을 반드시 해가 있는 동안에 통과해야 한다는 얘기를 서로 나눈다. 이 구간을 벗어나기 전에 일몰을 맞으면, 비록 우리 모두 헤드램프를 지니고 있지만, 안전을 위해 그 자리에서 밤을 지새야 한다는 절박감이 옥죄어 온다. 17시 경에는 짙은 구름이 낮게 깔리며 시야를 어둡게 한다. 비가 오면 안된다는 얘기를 서로 나누며 걱정하는데, 오래지 않아 빗방울이 떨어진다. 다행히 약간의 가랑비가 흩뿌리다 그친다.

이 쪽 저 쪽 안전한 루트를 찾아가며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지만 어느덧 20시가 되고, 이제는 헤드램프를 밝혀야 할 만큼 어두워 진다. Twin Peaks 정상을 0.25마일쯤 남겨 놓은 지점이다. 다행히 위태로운 구간은 벗어난 것으로 여겨져 너무나 감사한 마음이다.

마침내 Twin Peaks 정상에 오른다( 20:18). 우린 다 같이 ‘Hi, Five!’로 그 징글징글한 미궁을 빠져나왔다는 기쁨을 나눈다. 헤드램프 불빛에 드러나는 행색을 보니, 제이슨은 상의의 양쪽 팔 부분이 이리 저리 찢어져 나풀거린다. 앞장서서 길을 찾고 길을 내며 좌충우돌한 투혼의 상흔이다. 써니의 양 손에 낀 장갑도 열손가락, 두 손바닥 어디 하나 성한데 없이 구멍 투성이고, 로저는 손바닥에 출혈이 있는 상처까지 입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도 우리 모두 하나같이 다들 너무나 행복한 표정이다. 아직은 갈 길이 5.15마일이나 남았지만, 이제 어느 누구도 남은 구간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치 않는다.

깜깜한 중에 활짝 웃으며 기록용 정상사진을 찍는다. Stash 해 두었던 물을 찾아 시원스레 마음놓고 마신다. Waterman Mountain Junction을 통과한다(22:27). 얼굴과 목 그리고 양 손을 얼게 만드는 고산의 차가운 바람이 더욱 드세어 진다. 그럴수록 더욱 걸음을 바삐 놀려 거리를 줄여 간다.

마침내 Buckhorn Day Use Area의 주차장에 도착한다(23:20). 제이슨과 함께 기록을 점검하니, 왕복 16.7마일에 순등반고도 6700’의 산행이다. 숫자상으로는 그다지 특별한 등산이 아닌데, 무려 19시간 29분이 소요된 너무 이상하고 황당한 산행이다. 특히, 마의 그 3.2마일 구간만 떼어 놓고 보면, 겨우 왕복 6.4마일에 13시간 40분이나 걸렸으니 정녕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다’는 옛말이 있다. 우리는 정말 신비롭고 이상한 ‘도원경’에 들어 갔었던 것인가? 불과 6.4마일을 걸었을 뿐인데, 거의 14시간이 흘렀으니, 그 곳은 과연 다른 차원의 세상임이 분명타 할 것인가? 이 경우는 축지법과는 반대의 ‘신지법(伸地法)’이라는 말을 써서 이해를 해 볼 수 있을까? 구전설화에 의하면, 여우에게 홀리면 같은 자리를 계속 뱅뱅 돌게도 된다는데, 우리는 과연 무엇인가에 잔뜩 홀려서 14시간 동안이나 마냥 헛걸음질을 해댄 것일까?

아무튼 그 ‘아름답고 무서운 세계’를 무사히 잘 빠져나온 우리가, 역시 2번 도로를 이리 저리 잘 빠져 달려 LA Koreatown에 도착한다. 고맙게도 24시간 손을 반기는 곳에서 늦은 저녁을 먹고 나니, 집 나온지 꼭 24시간이 지난 월요일 02시가 된다. 물론, 다행히도 이로부터 6시간 뒤에 아내와 나는 3박4일 여정의 관광버스를 여유롭게 잘 탈 수 있었다.

식사중에 순두부보다도 훨씬 더 맛있는 산행담을 즐기면서 우리 모두가 만장일치로 공감한 말들을 적어 본다. “가장 위태롭고 힘든 등산이었으나 또 그런만큼 가장 뿌듯한 성취감이 솟아 난다.” “정녕코 지옥인줄 알았는데, 지금 이렇게 행복감이 자꾸만 솟아나니 아마도 그 곳이 천국이었나 보다. 그러나 결코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천국이다.” “이 세 쌍둥이 바위 산행을 하느니, Mt. Gorgonio 를 연이어 3번 등산을 하래도 일호의 주저없이 이를 택한다.” “나름대로는 힘들었다고 여기던 산행들 -Baldy2Iron, Rim2Rim(2Rim), R2R(Rosa-Villager-Rabbit), C2C, BW2T(Bad Water2Telescope), Big2+2, Gorgonio 9 Peaks, Baldy 9 Peaks - 도 이에 비하면 훨씬 나은 편이다!” “이 산행을 13시간에 마친 Erik Siering, Asher Waxman, Bob Gabriel을 만나면 기꺼이 경의를 바치겠다.” “트레일을 따라 두 발로 걷는 등산이야 말로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확실히 깨달았다.” “그동안 부지런히 HPS, DPS, SPS의 산들을 다녔지만 이런 곳이 있으리란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앞으로는 바위봉 아닌 Bush Whacking산행일 경우에도 스스로 헬멧을 착용하겠다.” “이런 곳인줄 알았다면 정말 결단코 오지 않았을 것이다.”

고역이긴 했지만 내가 이 산행을 잘 마친 배경에는 전적으로 일행들의 따뜻한 격려와 헌신적인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다리가 짧아 허공에 떴을 경우에는 그들의 두 손이 바위되어 기꺼이 발을 받쳐준다. 바위를 오르다 발과 손 사이가 너무 멀어 몸을 위로 끌어 올리지 못하는 상황에선, 제이슨과 로저가 위에서 내 팔을 잡고 온 힘을 다해 끌어 올린다. 제이슨과 써니는 앞에서 또 뒤에서, 안전하게 오르고 또 내리도록 세심한 배려를 해 준다. 로저는 여러가지로 나를 살피며 도움을 준다. 이들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내가 이 산행을 안전하게 잘 마칠 수 없었을 것이다. 중간에 포기했거나 아니면 추락하여 치명상을 입었을 가능성이 컸다. 팀웍과 시너지란 이런 것이겠다. 나는 그야말로 ‘땅 짚고 헤엄친 격’이다. 이 젊은 후배들이 있어 이 산행에 참가할 수 있었고, 끝없이 나타나는 난관들을 나름대로 무난히 극복해 낼 수 있었다. 아마도 치매에 걸리지 않는한, 평생토록 간직될 아름다운 추억이고 마르지 않을 행복이다.

오늘 이 21세기 고도문명의 하루 하루가 오히려 지루하고 따분하여 도무지 살 맛이 나지 않는 당신인가? 그렇다면 계획을 잘 세우고 준비를 잘 갖추어, 전 구간 218마일, John Muir Trail을 종주하시길 권하고 싶다.

신화에서나 만날 수 있는 이름들, Theseus, Hercules, Odysseus, Perseus들의 모험을, 21세기를 살고 있는 본인도 직접 체험하고 싶은데 그럴만한 무대가 이미 사라지고 없어 너무나 아쉬운 당신인가? 아름답기가 그지없는, 그러나 자세히 살피면 그녀의 삼단같은 머리채에 똬리를 튼 뱀들이 갈라진 혀를 날름거리고 있을, 요녀 Medusa의 목을 직접 베어보고 싶은 영웅적인 당신인가? 인터넷에 길을 물어 ‘세 쌍둥이 바위(Triplet Rocks)’를 찾아 가면 아마도 소원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단, 이 산행에 나서려는 분들에겐, 사전에 미리 생명보험금을 상향조정해 놓을 것을 적극 권장한다는 우스갯 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정진옥 310-259-6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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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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