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화산이 만든 검은 땅에 봄이 성큼···일본 규슈올레 (일본 규슈)

2019-03-08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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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올레 본 딴, 가고시마 대표 걷기길

▶ 종일 걸어도 행복한, 힐링로드를 따라

화산이 만든 검은 땅에 봄이 성큼···일본 규슈올레 (일본 규슈)

자연이 깔아준 융단을 밟으며 하늘 높이 솟은 삼나무 사이를 걷는다.

화산이 만든 검은 땅에 봄이 성큼···일본 규슈올레 (일본 규슈)

검은 모래가 깔린 가와지리 해변. 바람을 등에 업은 흰 파도가 들이친다.


화산이 만든 검은 땅에 봄이 성큼···일본 규슈올레 (일본 규슈)

구름모자를 쓴 것만 같은 가이몬다케.


인간의 흔적은 길이 된다. 그리고 그 길엔 다시 사람들이 모인다. 길은 그렇게 역사와 세월, 추억을 담고 인연을 모은다. 봄에 성큼 다가선 일본 남부 규슈는 능선 사이사이 쌓인 겨울의 흔적에 바다에서 불어오는 훈풍과 때이른 들꽃으로 가득 차 있었다.‘제주올레’를 본뜬‘규슈올레’ 2개 코스를 걸었다.

▲검은 해변과 들판에 부는 봄바람, 이부스키-가이몬 코스

잔뜩 흐린 하늘을 이고 길을 나섰다. 출발지인 가이몬(開聞)역 앞엔 노란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올레꾼을 반기고 있었다. 작은 무인 역에는 한 량짜리 열차가 무심히 멈췄다 지나쳤다.


한국에선 흔치 않은 풍경 속에서도 머릿속은 복잡했다. 공항에서부터 단 한 번도 맑은 하늘을 볼 수가 없었다. 걷겠다고 여기까지 왔는데,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듯 잔뜩 찌푸려 있었다. 목적지는 일본 최남단 기차역 니시오야마(西大山)역이다.

걱정은 생각보다 빨리 현실이 됐다. 몇 백 미터 가지도 않았는데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더니 급기야 비옷 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이름 모를 건물 처마에 잠시 신세를 졌다. 카메라부터 가방 에 밀어 넣었다. 안경알에 빗물이 맺혀 앞을 보기도 힘들어진 상황, 콘크리트 바닥만 응시하며 20여분을 걸었다. 약해진 빗줄기에 주위를 둘러보니 가가미이케 호수에 오리 떼가 유유히 헤엄치고 있다. 올레길 어디에서나 보이는 가이몬다케(開聞岳) 산이 수면에 비친 아름다운 모습은 상상만 할 수 있을 뿐.

길은 어느새 비포장 농로로 접어들었다. 코스 중간 허브농장에서 따뜻한 차를 마시며 비에 젖은 몸에 약간의 온기를 보충하고 올레 리본을 따라 다시 길을 나섰다. 어디선가 짭조름한 냄새가 나는가 싶더니 주택가 사잇길을 돌아서자 바로 바다다. 검은 모래로 가득한 가와지리 해안이다. 부서지는 파도에 하얀 포말이 검은 해변을 덮는다.

화산의 영향을 받은 가고시마는 검은 땅이다. 이부스키-가이몬 코스 막바지는 밭 사이로 나직한 오르막이 계속되는 길, 검은 해변에 이어 이번엔 검은 밭이다. 길 양편 비옥한 토양에는 배추와 상추가 자라고, 줄지어 선 비닐하우스에는 이미 봄 꽃이 활짝 피었다. 저 멀리 기찻길이 보인다. 종착점인 니시오야마 역이다. 시선을 돌려 다시 가이몬다케를 바라본다. 하루 종일 구름모자를 뒤집어쓴 산꼭대기, 흐리기만 했던 날씨가 왠지 밉지 않다.

▲신혼처럼 설레고 폭신폭신한 기리시마-묘켄 코스

올레꾼 생활 이틀째, 전날보다 짐을 줄여 최대한 가벼운 몸으로 길을 나섰다. 출발지 묘켄 온천거리는 도착지 시오히타시 온천 료마공원에 비해 지대가 낮은 곳이다. 여정이 어떻든 오르막길이 확정된 상황이다.

녹슨 다리를 건너 올레길 초입으로 들어서자 상한 달걀 냄새가 풍긴다. 유황온천 특유의 냄새다. 동료 올레꾼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계곡을 오르니 매화꽃이 반기고, 다시 한 굽이 돌았더니 울창한 숲이 눈 앞을 가린다. 나무껍질과 낙엽이 산길에 융단을 깔았다. 더 없이 푹신푹신한 오르막길 저 멀리에 이누카이타키(犬飼瀧) 폭포가 하얀 기둥처럼 쏟아져 내린다. 36m 높이에서 떨어지는 우레소리에 호젓한 숲길이 갑자기 분주해진다. 모두들 폭포 앞 전망대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지친 발걸음은 다시 힘을 얻는다.


한 명이 겨우 지날 법한 계단을 오르며 다시 숲에 몸을 맡긴다. 완만한 오르막길 주변으로 삼나무 숲이 울창하다. 가끔씩은 하늘을 보라는 듯 거침없이 쭉쭉 뻗었다. 몇몇은 아예 길에서 벗어나 삼나무 사이를 거닌다. 규칙과 질서로 똘똘 뭉친 일본에서도 이 정도 일탈은 괜찮겠지.

강줄기를 거슬러 동백꽃이 피어있는 작은 마을을 지나니 신사 하나가 버티고 있다. 와케 신사 안에는 빼곡하게 소원을 적은 소지가 주렁주렁 걸려있다. 한 켠에서 솟아나는 시원한 샘물로 잠시 피로를 씻는다.

이곳부터는 이정표가 두 개다. 일본 근대사의 전환점인 대정봉환과 메이지 유신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1836~1867년)의 산책길과 올레길이 겹치는 구간이다. 오래된 나무팻말에 쓴 ‘료마의 산책길’과 파란색과 빨간색 올레 리본이 번갈아 가며 길을 안내한다.

‘료마의 산책길’은 이들 부부가 걸었던 일본 최초의 신혼여행길이다. 가수 김동률의 노래처럼 “언덕을 넘어 숲길을 헤치고 가벼운 발걸음 닿는 대로, 끝없이 이어진 길을 천천히” 걷는다.

깊은 숲길이 지겨울 즈음, 오르막내리막이 반복되며 길은 다시 한번 리듬을 탄다. 4km쯤 되는 산책로 끝자락에 자리잡은 료마공원, 이끼가 고운 길을 조심스레 내려가다 난간에서 료마 부부의 그림자 조각과 마주친다. 신혼처럼 설레는 듯하면서 살짝 긴장감도 묻어난다. 공원의 작은 온천에 몸을 담그고 땀을 씻는다. 몸이 개운해지자 좀 더 걸어도 좋겠다는 욕심이 생긴다.

여행메모

● 규슈는 일본을 구성하는 4개 큰 섬 중 가장 남쪽에 자리잡고 있다. 인천에서 후쿠오카ㆍ가고시마ㆍ사가 등 공항에 직항편이 취항한다. 인천공항 기준 1시간 20분 정도 걸린다.

● ‘규슈올레’는 한국의 대표적인 도보여행길인 ‘제주올레’가 수출된 것이다. 2012년 2월 4개 코스로 시작해 현재 15개 코스 177㎞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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