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공에 얽힌 배일(排日)사상
2018-10-18 (목) 07:56:40
한성호 목사, VA
압록강의 두터운 얼음이 아직 풀리지도 않은 매섭게 추웠던 2월의 어느 날, 취학연령이 된 나를 데리고 어머니께서 찾아간 곳은 일본계통의 후다바(二葉) 공립초등학교였다. 각종 IQ 테스트에 실기까지도 잘 치렀는데 면접 코스에서 그만 보기 좋게 떨어지고 말았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의 유복자인데다가 조센징인 주제에 감히 일본계 학교를 넘보다니? 충분히 예견했을 어머니께서 어찌 그리도 무모하셨는지 하마터면 낫 놓고 “ㄱ”자도 모를 뻔했던 나를 구해준 것은 다행히도 어머니께서 집사로 봉직하시던 신의주 제3장로교회(한상동 목사)부설 삼일초등 학원이었다. 접수마감시한이 한참 지났는데도 별 복잡한 절차 없이 공부하게 된 걸 보면 역시 우리 어머니 김응옥 집사님의 빽(?)이었던 것 같았다.
집에서 불과 1킬로미터의 거리에 위치한 이 교회는 신의주시내 일곱개 장로교회 중의 하나로 벽돌건물 구조에 2층은 예배당, 아래층은 여섯 개의 교실을 만들어 주중에는 학교로 사용했는데 주로 영세민 가정의 자녀들이 대상이었다. 그 시절 우리를 가르치셨던 나이 지긋한 교사들 대부분이 항일(抗日)사상이 투철했던 교회장로나 집사들이었는데 여기서 내가 배일사상과 축구를 함께 배우게 될 줄이야.
2학년이 되던 어느 체육시간이었다. 선생님 한분이 빨간색을 입힌 고무공 하나를 운동장 한복판에 던져 주면서 “터져도 좋으니 마음껏 차라!” 하시는 명을 따라 영문도 모르고 죽어라 차댔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배일사상과 애국정신을 그런 식으로 가르치셨던 같다. 그 후로도 이런 은밀한 배일사상교육이 계속되었지만, 아무튼 먼 훗날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서 축구협회장이 되기까지의 파란만장한 내 축구인생은 일본에 대한 발길질에서 시작됐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일본계 학교를 낙방한 것이.
70년 긴 세월의 빗장이 풀리는 그날이 오면 제일 먼저 달려가고 싶은 곳, 내게 축구와 배일사상을 함께 배워준 삼일학원 교정이다. 거기만 가면 그때 그 선생님들, 그 또래들이 아직도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이게 요즈음 시도 때도 없이 나를 훌쩍거리게 하는, 정지용 시인의 “향수”다! “그곳이 차마 잊힐리야~~~”
<한성호 목사, V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