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한인 교수부부 비극으로 본 정신질환 망상장애
▶ 의처증·의부증 환자, 평소엔 증상 없이 정상, 의심 발동땐 폭행·학대
텍사스 주에서 40대 한인 대학교수가 역시 대학교수인 부인을 총으로 살해하고 집에 불을 지른 뒤 자살한 비극적 사건(본보 8일자 A1면 보도)이 한인사회에 크나큰 충격을 주고 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지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조만철 정신과 전문의는 “신문에 보도된 내용에 보면 남편 이현섭 교수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유서로 보이는 게시글에서 ‘아내가 자신을 의처증이 심한 집착 환자로 몰았으며, 웃으며 내 죽음을 맞이할 것’이란 내용을 남긴 것을 볼 때 의처증이었을 확률이 높고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또한 “의처증, 의부증은 망상장애의 일종으로 환자 스스로는 별다른 신체적 증상이 없고,
다만 상대방만 괴롭히는 고약한 습성이 있다”고 설명한 조 전문의는 “겉으로나 타인에게는 정상적이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자살이나 타살 같은 극단적인 위험한 선택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한 정신과적 질환”이라고 전했다.
#의처증, 의부증은 질투형 망상장애
‘정신 질환의 진단 및 통계 편람 5편’에 보면 조현병 스펙트럼 및 기타 정신병적 장애가 나온다. 조현병 스펙트럼 및 기타 정신병적 장애에는 조현병, 기타 정신병적 장애, 조현형(성격) 장애 등이 있다. 이들은 망상, 환각, 와해된 사고(언어), 극도로 와해된 또는 비정상적 운동 행동(긴장증 포함), 음성 증상의 다섯 범주 중 하나 이상의 증상이 있는 경우로 규정된다.
이중 망상(Delusions)에는 피해망상, 관계망상, 과대망상, 색정망상, 허무망상, 신체망상 등이 있다. 망상장애의 아형에는 색정형, 과대형, 질투형, 피해형, 신체형, 혼재형 등이 있는데, 이중 질투형 망상장애에 의처증, 의부증이 속한다.
질투형 망상장애로 볼 수 있는 의처증이나 의부증이 있으면 보통 다른 정신질환 우울증 불안증과 달리 잠도 잘 자고, 먹는 것에도 별로 문제가 없다. 다른 것은 다 정상적인데, 배우자가 부정을 저질렀다는 망상만 있는 것이 특징이다.
별 이유없이 배우자가 불륜을 저질렀다거나 혹은 옷에 뭔가 묻어있어도 의심하거나, 평소 산책하던 길이 다르다든가 등의 단편적 증거를 가지고 상상하며 그것을 확고히 믿는다.
조현병과 망상증의 특징은 현실감을 상실하는 것으로, 특히나 망상증은 상식적으로 이해 안되는 생각을 자기만 굳게 믿고 있는 질환이다.
#사례들
의처증, 의부증의 사례는 일반적인 생각보다 상당히 많다. 특히 노년기에 들어서면서 노인은 건망증과 함께 의처증, 의부증이 찾아올 수 있는데, 부부간 폭력이 종종 발생하기도 한다.
교회에서는 장로로 사회적으로는 인망이 두텁고 칭찬이 자자하지만, 집에만 들어오면 아내에게 못할 짓을 하는 사례도 있다. 조 전문의는 “나이 많은 노부부인데 아내가 의부증을 갖고 있어 남편이 잠을 자다가 화장실에 가도 불륜녀에게 전화한다고 확신한다”는 사례를 들었다.
또한 노인 중에는 기억력이 점차 없어지면서 며느리가, 혹은 사돈이 물건을 훔쳐갔다는 피해망상에 빠지면서 건망증과 함께 망상으로 의처증, 의부증이 찾아오는 경우도 종종 있다.
#망상증과 조현병 어떻게 다른가
망상증은 있을 수 있는 한 가지를 믿는다. 예를 들면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고 생각하는데, 바람을 피우는 정도는 현실에서도 가능한 일이다. 그렇지만 조현병(정신분열증)에서는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고 가정하면, 외계인이 와서 만난다는 등 황당한 내용을 포함한다.
또한 조현병은 대개 정상적인 직업도 없고, 사회생활도 불가능하다. 가끔 사회생활이 가능한 경우도 있지만 극히 드물다. 영화 ‘뷰티풀 마인드’의 주인공 존 내쉬 수학자는 피해망상형 정신분열증을 가진 사람이었다.
#망상장애 아형들
‘정신 질환의 진단 및 통계 편람 5편’에 실린 망상장애 아형에는 색정형, 과대형, 질투형, 피해형, 신체형으로 나뉘는데, 질투형에 의처증, 의부증이 들어간다.
색정형은 어떤 이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망상을 갖는다. 예를 들어 유명 스타가 나를 좋아한다, 높은 지위의 상사가 나를 좋아한다, 혹은 아예 낯선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고 믿고 그 사람의 주변에 접촉하려고 한다.
과대형은 어떤 굉장한 재능이나 통찰력을 갖고 있다거나 혹은 중요한 발견을 했다고 확신한다. 예를 들어 ‘나는 트럼프 대통령 고문이다’, ‘나는 아주 특별한 사람이다’ 등이 과대형이다.
피해형은 ‘FBI가 나를 추적하고 미행한다’같은 어떤 음모, 속임수, 염탐, 추적, 독극물이나 약물 주입, 악의적 비방, 희롱, 장기적 목표 추구에 대한 방해 등을 당하고 있다고 믿는다.
신체형은 뇌에 암이 생겨서 죽을 것 같다고 믿는다. 또는 피부 위나 속에 벌레가 있다거나 신체 어느 부분이 기형이라거나 흉하게 생겼다고 믿는다.
질투형에 속하는 것이 의처증, 의부증으로 배우자가 불륜을 저지른다고 생각한다. 중년에 이런 경우가 많고, 갱년기에 건망증이 생기면서 함께 오기도 한다. 의처증 때문에 부인을 때리거나, 옷에 정액이 묻었다는 등 여러 이유들을 대면서 증거를 찾는 환자도 많다.
의처증, 의부증은 배우자가 외도한다고 생각하는 망상 외에는 다른 신체적 증상이 없어서 겉으로 봐도 정상적으로 보이는 경우가 많다. 특수 전문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도 많고, 다른 이들의 존경을 받거나, 종교계에서는 중책을 맡은 사람도 있다. 조 전문의는 “만나본 환자들 중에서 남성은 성직자, 기술계통, 학자 등 특수직에 조금 더 많았다”고 말했다.
다른 정신질환과는 달리 신체적 증상이 없다. 환자 스스로는 별로 괴로운 것이 없기 때문이다. 신체적으로 학대해도 외부적으로는 표시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일반적인 가정불화가 아니라 극단적인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망상으로 생각했던 배우자의 바람 대상(실제는 아닌)을 살해한다거나, 배우자가 학대받다가 자살하는 수가 있고, 결국 배우자를 살해하는 경우가 있으므로 의처증, 의부증을 정신질환 중 하나로 이해하고, 전문가적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환자를 설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치료
의처증으로 피해를 당하는 아내는 억울하지만 잘못한 게 없고, 치료 받으러 가자고 했다가 폭력을 당하는 일도 많으며 자녀 때문에 이혼도 하지 못해서 속으로 참고 지내게 된다. 더구나 배우자가 사회적 지위가 있을수록 더 많이 참다가 10년이나 지나서 병원을 찾아오는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망상으로 의처증, 의부증이 의심되면 가족이 다 알아도 환자는 병원까지 가는 것조차 힘들 수 있다. 자신에 대한 문제 인식이 전혀 없기 때문에 치료는 생각하기 힘든 것이다.
조 전문의는 “병원까지 오려면 대놓고 의처증, 의부증이라고 하지 않고, 서로 스트레스가 쌓이고 행동조절이 되지 못하니, 가족 상담으로 함께 부부가 올 수 있게 유도한다. 함께 스트레스를 치료하고 힘든 내용을 공감하면서 조금씩 환자가 자신의 괴로움을 얘기할 수 있게 유도하면서 스트레스 때문에 혈압이 높으니, 혈압약 복용해야 한다고 하면서 정신과 약을 처방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약물치료는 항정신제인 레스피돌이나 올란제핀, 브레일라 같은 약이 처방된다.
조 전문의는 “의처증, 의부증은 완치되는 경우가 드문 치료가 제일 어려운 질환 중 하나”라면서 “하지만 정신질환의 하나로 이해하고 사회적 체면을 내려놓고 전문가의 상담과 치료를 적극 받을 것을 권한다”고 덧붙였다.
미국에서는 신체적 폭행을 당했을 경우 바로 경찰이나 911을 부를 수 있고, 가정학대죄로 재판을 받다가 나중에 의처증 또는 의부증 진단이 나오면 강제 치료를 하는 경우도 있다.
<도움말 주신분> 조만철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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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온 객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