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수필가 방인숙의 가을 여행기③ 쉐난도

2018-03-30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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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개 사이사이 구릉은 몽유도원도가 따로없어

수필가 방인숙의 가을 여행기③ 쉐난도

안개 짙은 전망대 에서 내려다본 정경을 배경으로 한 필자.

아름다운 강과 계곡.20m넘는 폭포 곳곳 포진
동서로 가르는 스카이라인 드라이브 미 10대 드라이브코스
여우.흰점백이 사슴.그라운드호그 등 수많은 동물들 자생
산월계수 꽃들 만발한 봄철 트레일 장관

루레이 동굴을 본 후 북쪽으로 30분가량 이동해 스트라스버그(Strasburg)에 도착했다.
오늘의 첫 일정은 버지니아 주의 불루 릿지(Blue Ridge)산맥을 따라 좁고 길게 형성된 쉐난도의 단풍관광이다. 쉐난도의 해발이 보통 2000피트에서 4000피트 넘는다니 고산증세에 예민해 은근히 겁난다.

쉐난도 어원은 인디언 부족에 따라 ‘별들의 딸’ ‘높은 산의 강’ ‘숲속의 사슴’ 여러 가지다. 인디언 추장이름이 쉐난도 이기도 했다나. 곰곰 따져보니 쉐난도 구경이 오늘까지 포함 네 번째다. 미국에 온지 얼마 안돼서 워싱턴에 사는 남편친구가족의 안내로 두 번 왔었다. 그때 60-70년대 방영됐던 미국드라마 ‘보난자’에 나오던 노래가사의 쉐난도가 바로 여기라는 말을 듣고 꽤나 감개무량했었다. 당시 ‘보난자’에서 막내아들로 분한, 마이클 랜던도 좋아했었다. 그가 극중에서 부르곤 했던 “오! 쉐난도”란 노래 또한 얼마나 좋아했던가. 그 노래가 팝송이 아니고 미국 민요란다. 인디언추장의 딸을 사랑했던, 쉐난도 강을 왕래하던 뱃사공의 애환서린, 선원들 민요라는 샨티(Shanty)란다. 가수들마다 여러 버전으로 번안 조금씩 가사가 다르지만, 마이클 랜던(Michael Landon)노래가 제일 가슴을 파고든다.


“Oh! Shenandoah! I long to see you/Away/You rolling river/Away/Oh! Shenandoah! I long to see you/Away/I’m bound away/Cross the wide Misseuri.( 오 쉐난도. 난 정말 너를 보고 싶다. 멀리 굽이굽이 흘러가는 강! 쉐난도! 나는 정말 너를 보고 싶다. 멀리 넓은 미주리 주를 지나 멀리도 왔구나.

또 이 노래는 옛 명화 “쉐난도”의 주제곡으로도 유명하다. 영화는 쉐난도에 사는 반전주의자 제임스 스튜어트가 남북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징집된 아들을 역 추적하는 과정에 가족 3명을 잃는, 절절한 부성애의 영화다. 주제곡 외에도 유명한 명대사가 떠오른다.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다르고, 사랑보다 좋아하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 사랑은 식고 변할 수 있지만, 좋아하는 마음은 영원하다.” 그 말에 절대 공감이다.

여하간 쉐난도는 900m이상 산봉이 60개가 넘는 고지대다. 가장 높은 혹스빌(Hawksbill)은 4051피트(1235m)다. 얼마나 강과 계곡이 아름답고 20m넘는 폭포들이 많은지 곳곳에 포진한 트레일을 다 합치면 500마일이 넘는단다. 북부 메인 주에서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스모키 마운틴을 지나 남부 조지아 주에 이르는 애팔래치안(Appalachians)트레일과 100마일가량 겹친다. 고로 쉐난도의 남쪽 끝에서 469마일 내려가면 스모키 산이 나온다.

쉐난도는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Roosevelt)대통령에 의해 1935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기 전 쉐난도의 절경에 매혹된 후버(Herbert Hoover)대통령은 소박하고 전원적인 Rapidan Camp라는 별장을 지어놓고 애용했단다. 그 별장이 지금은 후버대통령전시관으로 일반에게 공개 중이다. 1976년엔 공원의 40%가 환경보전지역으로 정해져 국립환경보전시스템에 의해 관리보호 되고 있고.

그런 험준한 산세와 빼어난 비경을 나 같은 서민들도 즐기게끔 스카이라인 드라이브 길을 뚫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공원을 동서로 양분하는 왕복 2차선도로는 1931년부터 무려 8년 만에 완성됐다. 105마일에 이르는 도로엔 5마일마다 이정표가 있고 전망대도 75군데나 된다. 아름다운 풍광으로 당연히 미국의 10대 드라이브코스에 들어가 매년 100만 명 이상의 탐방객들이 조망한다나.

우린 스트라스버그 에서 묵었기에 가까운 북쪽입구(Front Royal)로 들어갔다. 버스는 초반부터 급격히 고공행진이다. 숲을 보아하니 미 동부 단풍관광지 1위라는 타이틀이 무색하다. 통계상 단풍절정이 10월 10일부터 25일 사이고 오늘이 29일이니 불과 며칠차이인데 단풍이 영 아니다. 안든 건지 지난 건지, 간간히 노랑과 주황만 섞였을 뿐 빨강색이 없는 미지근한 단풍색이다. 내 관찰에 의하면 사시나무군인 애스펜(Aspen)의 노랑과 스트라이프 메이플(Stripe Maple)의 주황색 단풍이 먼저 든다. 만약 단풍끝물이라면 나목들이 많을 텐데 아직은 없다. 그럼 이제 시작인가? 내 기억에 쟁여진 쉐난도 단풍은 온 산이 타는 듯 만산홍엽이었다. 산허리 중간쯤에 상록수 가문비나무들의 초록벨트로 한층 더 환상의 조화였고. 어차피 지금은 안개가 짙어 단풍잔치라 해도 감상은 물 건너갔겠지만...

처음 멈춘 Gooney Run Overlook(2185ft)전망대다. 쉐난도는 서쪽은 강과 계곡, 동쪽은 버지니아의 드넓은 평원이다. 눈앞 발아래로 내려다보이는 확 펼쳐진 저 평원이 이태리말로 ‘산자락’이란 뜻의 피드몬트(Piedmont)구릉인가보다. 초기 유럽정착민들이 고향땅과 유사하다며 붙인 이름이란다. 저 멀리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들까지 시야에 잡힌다. 비구름과 안개 틈새로 엿보이는 전경이라 더 몽환적이다. 이건 몽유무원도(夢遊霧原圖)다.


두 번째 Hogback 전망대는 3385피트다. 좀 전의 전망과 달리 삼면이 파노라마다. 눈 아래에 높고 낮은 산봉들이 어깨동무하고 있어 속리산의 문장대에 오른 듯싶다. 아주 멀리 강줄기가 가물가물 흐른다. 저 아래 ‘조지 워싱턴 국립 삼림지대’를 가운데 두고 건너편 뒤쪽은 North Fork쉐난도강, 앞쪽은 South Fork쉐난도 강으로 나뉜다. 인제 세우(細雨)까지 내리니 아스라한 강줄기가 마음을 더 애잔하게 만든다.

고산병은 나만이 아니었는지 다급한 누군가의 요청에 버스가 멈췄다. 나까지 대여섯 명만 내렸다. 이슬비를 맞으며 거푸 심호흡을 하고나니 속이 좀 진정된다.

빗줄기와 더 짙어진 산안개로 산은 안개터널 속으로 숨었다. 산 안엔 여우, 흰점백이 사슴, 흑 곰, 얼룩다람쥐, 야생칠면조, 마멋(Marmot)의 일종인 그라운드호그(Groundhogs)등등 수많은 동물들이 자생한다. 행여 그들이 출몰해 희생될까봐 제한속도가 35마일이다. 하늘 숨결인양 자욱하게 내리는 안개비로 촉촉하게 젖어든 도로라 버스는 숫제 거북이 속도다. 인생살이의 모호한 미래처럼, 좌우는 고사하고 전방마저도 온통 뿌옇고 불투명하다.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의 시중 가장 사랑받는<안개 속을>이란 시가 있다.

“안개 속을 헤매면 이상하여라!/숲이며 돌은 저마다 외로움에 잠기고/나무는 서로가 보이지 않는다/모두가 다 혼자다/(...)/인생이란 고독한 것/(...)/사람들은 서로가 모르고 산다/모두가 혼자다.”

단풍구경 포기의 아쉬움커녕 무사히 하산하는 게 급선무다. 반마일만 더 가면, 1932년에 화강암을 뚫는 난공사로 석 달 걸려 완공된 쉐난도 명물 Marys Rock(183m)터널과, 제일 높은 포인트인 스카이 랜드 전망대를 지척에 두고, 중간 출입구로 빠졌다. 스카이라인을 남북으로 관통하려면 보통 서너 시간 잡는다는데, 고작1시간 정도만 달렸다. 지도를 보니 전체구간 가운데 31마일 반쯤에 있는 Thornton Gap출구로 나가 211번 도로를 타고 워싱턴으로 갔던 것. 여행사스케줄대로였는지 우천이라 서둘러 철수한 건지는 모르겠다. 여하튼 스카이라인을 삼분의 일도 못가 후퇴한 셈이다. 그럼에도 미련보다는 감사함이 앞서 운전기사 분께 박수를 보냈다. 시야확보악조건의 산길 드라이브는 아슬아슬한 곡예운전이었으니까.

여건이 허락하면 봄에 트레일도 걸어봤으면 하는 소망을 품어본다. 봄엔 특히나 Rady’s Slipper(개불알꽃), 미국백합과인 연령초(Trilliums), 미국의 석남화라는 상록수인 산월계수(Laurel)꽃들이 만발하면 장관을 이룬다는데. 거기다 개똥지빠귀, 멧새, 딱따구리, 매 등 200여종 넘는 새들의 낙원이고. 얼마나 눈과 귀가 즐거울까. 상상만으로도 벅차온다.

일단 희망을 갖고 꿈으로 남길밖에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도 “희망은 잠자고 있지 않는 인간의 꿈이다. 인간은 뭐든 꿈이 있는 한 도전해볼만하다”했지 않은가. 쉐난도 단풍관광은 저장돼있던 기억으로 만족하자. 버스는 워싱턴을 스쳐 볼티모어의 롱우드 가든으로 향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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