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197) 제33대 Truman 대통령⑪

2018-03-02 (금) 조태환/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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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의 세계확산 가능성에 극도의 경각심을 갖게된 미국은 한국전쟁을 참전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유럽에도 방위망을 치기 시작하였다. 유럽의 우방들에게 매해 증가되는 군수물자들을 원조하였다.

신설된 Eisenhower 장군의 NATO 에 미군 4개사단이 보내어 졌으며 소련을 주적으로 전제하여 소련의 주요 목적지를 폭격할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영국, 불란서, 이태리, 북아프리카, 터키등의 우방국들에 항공 기지망을 신설 하였다. 이와 병행하여 태평양에 있는 여러나라들과 방위조약들을 맺기 시작하였다.

필리핀과 1951년 8월에 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었으며 9월에는 Australia, New Zealand, 미국등 3개국이 ANZUS Pact 라는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였다. 곧이어 9월에는 San Francisco 에서 소련을 제외한 48개국이 일본과 평화협정을 맺었다.


이 협정은 국무성 고문이었던 John Foster Dulles 의 작품이 었었는데 그는 향후 일본을 대공산권 전략의 본거지로 이용할 속셈이었던 까닭에 우리나라 한국의 대미, 대일본 외교에는 불리하게 작용할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일본이 미국에게 전략적 가치가 높아진다는 것은 우리나라의 상대적 가치는 떨어지게 되고 한일관계에서 미국은 일본의 손을 부득이 들어줄수 밖에 없는 가능성이 높아지는 까닭이다.

일본은 WWII 의 패전으로 제국주의의 꿈은 접게되었지만 독일이 부담해야 했던것 같은 국가경제를 파멸시킬 정도의 전비보상 부과를 면제 받았었고 전후 얼마되지 않아서 국가주권이 회복 되었었다. 미국과 일본이 상호방위조약을 맺은것과 동시에 미국은 일본에 육해공군 기지들을 확보하게 되었으며 불과 얼마전까지 태평양에서 최악의 적대국가 이었던 일본은 미국의 태평양 전략의 초석이 되는 나라로 변해졌다.

Douglas MacArthur 장군 (1)
미국 장군들중 “가장 장군스러워 보이는” 이라든가 “가장 귀족스러워 보이는” 등의 얘기가 나오면 아마 많은 한국사람들은 Douglas MacArthur 장군을 머리에 떠올리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를 “교만하다고 결론지을수밖에 없도록 거만하고 분수도 모르고 타협이 없는 외골수” 이었다라고 생각하는 한국인들은 그렇게 많지는 않으리라고 생각 한다. MacArthur 장군은 극찬과 혹평을 다 받았던 인물인데 그를 잘 아는사람들은 두가지 가 다 맞는 평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의 장단점은 오랜 군대생활에서 때로는 유리 하게, 때로는 불리하게 반영되어 있다. 필자는 군대에 있을때 한국 육사를 졸업한 육군대위가 MacArthur 에 대해서 거의 신격화해서 얘기하는것을 들은적이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를 한국전쟁중의 명장, 특히 인천상륙작전의 전략가로써 기억할 것이다. 오랜시간이 지난후 우리나라에서는 그의 동상을 세워야만 한다는 쪽과 그런 동상은 없애버려야 한다는 쪽간의 양극의 평가를 받은 인물이다. 미국 역사에는 말썽도 많았던 명장으로, 우리나라 역사에도 깊히 새겨져 있는 MacArthur장군의 면면을 짧게 살펴보기로 하자.

두번 낙방했으나 일등으로 육사를 졸업한후 다섯번째 육군원수가 된 MacArthur
MacArthur장군은 할아버지가 판사와 Wisconsin 부지사를 지낸 정치인이 었었고 미국 육군의 Arthur MacArthur, Jr. 중장의 삼남중 막내로 태어났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남북전쟁때 북군으로, 두 형제들은 남군으로 참전하여 서로 결혼식에도 가지 않았을 정도로 불화했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가 대위이었을적에 군 영내에서 태어난 MacArthur 는 말을 시작하기전에 말을 먼저 탓었다고 한다. MacArthur 부자는 미국 최초로 부자가 최고의 훈장인 Medal of Honor 를 받은 사람들이었으며 그는 다섯번째로 미국 육군원수가 되었던 장군이다.

MacArthur 는 미국 육군사관학교에 두번 낙방을 하면서 다니던 Texas Military Academy 를 1등을 하고 다니면서 개인교수까지 받으면서 세번째에 West Point 에 합격된 후에는 기록적인 성적의 1등으로 졸업을 했다. 그는 육사낙방의 교훈은 “모든일은 사전에 충분히 준비하라”는 것이었다고 술회했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가 육군준장 이었을때 사관학교에 입학하자 그의 극성스러운 어머니는 교내에 있는 집을 세내어 살았었다고 한다.

장군의 아들이었다는 점이 아니꼬웁기도 했었겠고 특히 그의 조부가 북군에 참전했었다는 얘기때문에 그는 남부출신의 상급생도들에게 엄청난 기합도 받고 몰매를 맞았었다고 한다. 그무렵 상급생도들의 과도한 기합으로 사관생도 한명이 사망한 사건이 일어나자 미국 국회 조사단이 진상 조사를 하였는데 MacArthur 는 기합의 전말을 상세하게 진술하면서도 끝까지 상급생들을 고발하지않아 그들이 처벌을 면하도록 하였었다고 한다. 기합금지령이 내렸었으나 그후에도 기합은 계속되었었다고 한다.


그는 최연소 육사교장으로 West Point 에 돌아와서는 체육교육을 강화하여 모든 생도 들이 한가지의 운동에 참여하도록 하였고 상사급 교관들이 생도들의 실전훈련을 하게 하였고 완전무장을 한채 장거리 행진을 하도록 하였었다. Honor System 을 도입하여 생도 들이 자진 고발하고 “재판”을 하여 학교당국에 처벌을 건의하도록 하였었다.

육사교과목도 대폭 개정하여 정치, 경제, 외교 등등 Liberal Arts 과목들을 추가하였고 “남북전쟁사” 대신 “제1차 세계대전사” 를 공부하게 하였는데 교과목 개정은 육사교수, 육사졸업장교들의 많은 반대를 받았었다고 한다. 그의 육사개혁 노력은 전부 지속 되지는 않았었지만 그의 개혁시도는 좋은 평가를 받았었던것 같다.

육사 우등졸업생들이 배치 되었었다는 공병장교로 군대생활을 시작한 그는 Texas, California 등 미국내에서 군대생활을 시작하였는데 제1차 세계대전때에는 유럽 여러곳의 전장에서 무공을 올려 많은 훈장을 받았었다. 남미의 Veracruz 에 가서는 적진 깊숙히 비무장 기관사들을 데리고 혼자서 무장한채 세번의 기습을 받아서 옷에 네개의 총알구멍이 나면서도 기관차를 탈취해오는 큰전공을 올렸으나 훈장심사 위원회는 소속 지휘관의 허락이 없이 만용을 부려서 다른 장교들에게 모범이 되지 못한다고 해서 훈장을 주지 않았었다고 한다.

California 에 있던 아버지의 부관으로 아버지와 함께 인도, 중국, 태국, 일본등의 Asia 국가들을 관광하여 Asia 에 대한 안목이 일찍부터 뜨여졌었던듯 하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전 부터 필리핀에서 근무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중에는 필리핀, Australia 와 남태평양 전투를 아주 어려운 상황에서 지휘하다가 일본 침공을 준비하고 있던중에 원자탄을 맞은 일본이 무조건항복하자 1945년 9월 2일에 Missouri 함상에서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받았었다.

MacArthur 는 100개 이상의 각급훈장들을 받은 명장이기도 하였지만 정치적 감각도 뛰어난 “야심가” 이기도 하였었다. 그러나 자신은 표면에 나타나지는 않으면서도 남들의 “추대”를 받아 해 보고자 했던 대통령이 되어보지는 못하였다. 그의 정치적 감각과 능력은 2차전후 3년여의 일본의 군정통치에서 잘 나타났었다. 그는 일본 전범재판의 판결을 최종 확정하고 집행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일본의 행정조직을 존속시켜서 활용해야 하는 것임을 곧 인식하였고 무엇보다 일본국민들이 “신”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천황을 전범 으로 처형하면 일본인 전체의 반감을 받아 저항을 받게될 것임을 알아차렸다. MacArthur 는 자신이 일본국민들에게 해야할 말을 천황을 통해서 하였고 천황과는 “동업자”이지만 자신이 Senior Partner 임을 일본국민에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조태환/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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