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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인 칼럼] 술이 아니라 내가 주범이다

2018-03-01 (목) 김 숭 목사/ 새크라멘토 크로스포인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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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은 소위 ‘만물의 영장’이라고 불리는 인간과 그들의 한 수 밑인 다른 피조물들을 구분하는 장치가 된다. 성경에서는 그것을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이라고 부른다. 인간이 이성적 존재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그 이미지를 닮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이 인간다우려면 할 수 있는 한 이성적으로 살아야 한다.

하지만 살다 보면 그렇지 못할 때가 있다. 이게 잦아질수록 사람은 비이성적으로 된다. 비이성적이라는 표현은 그래도 좋게 말해주는 거다. 거칠게 표현하면 인간이 ‘짐승 수준’으로 격하되는 때를 말한다. 우리가 심하게 비이성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을 놓고 그 사람 짐승 같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짐승은 왜 비이성적일까? 그들은 철저히 감각 위주로 살기 때문이다. 배고프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성욕이 차오르면 대상 안 가리고 배설하고, 이처럼 그들의 모든 것은 그들 안에 내재하는 감각적 본능에 의존한다. 그래도 인간이 인간인 것은, 때론 짐승보다 더 많이 먹는 순간마저도 내가 지금 이렇게 많이 먹으면 안 되는데, 고민하면서 먹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래야 할 인간이 통제 불능의 비이성적인 존재로 둔갑하는 순간이 있다. 술에 취할 때다. 필요에 의해 적게 마시는 술이 아닌, 아예 술독에 빠져버리는 순간이다. 저 사람이 저런 사람이었어?, 라고 주변을 불안케 하는 일들은 그가 만취했을 때 일어난다. 술은 이와 같이 가장 이성적인 사람까지도 가장 비이성적인 사람으로 둔갑시키는 힘을 지닌다.

어렸을 때 목격한 장면이다. 나 살던 집은 한옥이었다. 대문도 그 당시 한옥에 걸맞게 나름 상당히 단단한 목재로 디자인된 문이었다. 그런데 어느 여름밤 대문이 쾅 하며 부서졌다. 놀라 나가봤더니, 생판 모르는 한 만취 중년남성이 대문을 쳐부수고 우리집에 난입한 것이다. 그는 무턱대고 아래채 셋집 방문을 열어 재꼈다. 그때 옆방 아줌마는 혼자 있었다. 그는 아줌마를 향해 욕을 해대며 누구누구 나오라고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아마 우리집이 자기집인 걸로 알았던 모양이다. 우리는 신고와 함께 그를 파출소로 넘겼다. 다음날이 됐다. 대낮에 과일바구니를 들고 그가 집에 찾아왔다. 어젯밤의 그 사람과 오늘의 이 사람은 완전히 달랐다. 전혀 기억이 안 난다며 어젯밤 일로 큰 사죄의 절을 올렸다.

어린 나이였지만 난 그때 술이란 게 이런 거구나, 깨닫게 되었다. 그 뒤로 이런 비슷한 일들이 만취의 술판 자리서 종종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흔히 필름이 끊겼다고 말한다. 정말 필름이 끊겨 도대체 내가 뭔 일을 저질렀는지 모르는 일들이 온 세상의 술판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요새 ‘미투(ME-TOO)’ 운동이 한창이다. 가장 정직해야 할 법조계에서, 고상한 예술 추구에 몸담으며 우리보다 한발 앞선 정신세계를 산다는 이들이 모인 문학계와 예술계에서, 그리고 가장 합리적 지식을 선도한다는 학계에서, 그들은 하류인생들에서나 볼 수 있는 성희롱과 성폭력의 민낯을 내밀어왔다. 그런데 그들 증언의 앞뒤 문맥을 살펴보면, 그 일들 거의가 다 술자리서 벌어진 것들이었다(물론 맨 정신에 그랬던 이들도 있다. 아, 파렴치범들이여!).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물어야 한다. 그렇다면 술이 주범인가? 아니면 그 술을 마셔댄 그 사람이 주범인가? 난 진정으로 이럴 줄 몰랐단 말인가? 아니면 그럴 걸 예측했으면서도 막 들이켰단 말인가? 필름이 끊겨서 몰랐다? 이 말로 다 핑계 댈 수 있는 사안인가, 이게? 과연 누구의 책임이란 말인가? 우리는 언제부턴가 필름 끊겨서 몰랐다, 이러면 봐주는 분위기 속에 살아왔다. 그러나 이젠 그건 더 이상 이유가 될 수 없다. 그러기엔 일들이 너무 커져버렸다.

성경 에베소서 5장 18절에 이런 구절이 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술과 성령의 공통점은 그 둘 다 어느 한 사람에게 들어가면 ‘(만)취하게’ 만드는 특성이다. 서로 다른 점은 그 만취의 ‘결과’이다. 술은 사람을 비이성적으로 만들어 비이성적 행동을 하게 하나, 성령은 그것에 취한 이를 아름다운 이성의 사람으로 변화시킨다. 이것이 곧 술 대신 성령에 취하라고 성경이 우리에게 명령하는 이유이다. 술이 주범이 아니다. 그럴 줄 알았으면서도 술을 들이키는 내 자신이 주범이다.

<김 숭 목사/ 새크라멘토 크로스포인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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