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189)제33대 Truman 대통령③

2018-01-05 (금) 조태환/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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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국들의 승전과 함께 전에 언급한 국제적인 문제들이 생겨났었었다. 전쟁의 종료는 미국 국내에도 여러가지 문제들이 생겨 나도록 하였다. 이 새로운 문제들을 Truman 대통령은 비교적 과감하게 잘 처리해 나갔었다.

전쟁은 끝났으나 미국의 전시 경제체제를 다시 평화시의 경제체제로 신속하게 바꾸는 것이 쉽지 않았었다. 닥쳐올 가능성이 큰 inflation 과 실직문제를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전쟁 때문에 억제되어 왔던 기업과 노동자들의 각종의 욕구들을 어떻게 충족시킬 것인가? 군에서 제대되는 수많은 남녀 군인들을 다시 민간인 생활로 순조롭게 전환시킬 대책은 무었인가? 정치경력이 대단치 않았던 신임 Truman 대통령이 처리해야할 긴박한 과제 들이었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Truman 이 제일 먼저 처리해야할 문제는 미국 역사상 최대한으로 증대된 미국 군대의 감축이었다. Truman 의 원래의 계획은 서서한 군대감축이 었었다. 그러나 집에 돌아가고 싶어서 일부 군인들이 집단시위를 하는등 감군을 속행하라는 압력이 강하게 들어오자 부득이Truman은 1946년 여름까지 현역군인을 1200만명에서 300만명 으로 감축하였다. Truman 은 “이것은 감군이 아니라 미국군대의 분쇄이다” 라고 우려 하였었으나 미국은 여전히 세계 유일의 원자탄 보유국으로써 세계 최강국이 었었다.


다행히 미국국회는 전쟁중이었던 1944년 6월에 위와같은 급격한 감군의 대비책으로 흔히들 “GI Bill of Rights” 라고 불리우는 “Servicemen’s Readjustment Act” (제대군인 재활 후원법) 을 입법하여 놓았었다.

참전용사에게는 G.I. Bill 을, 파업노조에는 Taft-Hartley Act 를
이 GI Bill 에 따라 상이군인들에게는 병원치료를 해주었고 불구자들에게 치료소가 제공 되었으며 무직인 제대군인들에게 수당을 지급 하였으며 연방공무원 채용시에 제대군인에게 우선권을 주었으며 제대군인들이 집을 사거나 농토를 사거나 사업체를 구입할때에 자금을 융자해 주었다. 또 원하는 제대 군인들에게는 학비면제, 무상교과서, 기타 비용들이 제공되어서 기술교육이나 대학교육을 받을수 있도록 해주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제대군인 800만명이 145억불이 지출된 이 GI Bill 의 혜택을 보았었다고 한다. 또 하나의 다른 문제는 종전후 어느부서(육군혹은 민간) 가 Uranium 과 Plutonium 등의 핵분열 물질을 관리 하느냐 하는 문제이었는데 1946년 8월에 Atomic Energy Act 가 입법되어 민간인 위원 5인으로 구성된 Atomic Energy Commission (AEC) 이 미국의 모든 핵분열 물자를 통제하게 하였는데 AEC 는 민간용이나 군용을 위하여 민간이나 정부 주도하의 원자력연구와 개발이 되도록 하는 책임을 지고 있다. AEC 는 설립된후 불과 10년만에 년예산 25억불, 직원 7천명이 되는 기구로 성장 하였었다.

평화시 경제체제하의 고용증대를 위하여 1946년 2월에 고용증진법이 입법되었고 새로운 직업의 창출과 경제성장을 촉진할 정책에 대하여 대통령과 국회에 정책건의를 하도록 하기 위하여 Council of Economic Advisors (경제자문위원회) 가 신설 되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미국은 거의 자동적으로 평화시 경제체제로 순조롭게 변화해 가고 있었다. 다만 일자리는 모자라지 않았으나 도처에서 물자들이 부족 하였었다. 물자부족의 원인은 종전후 사방에서 일어난 노동쟁의와 inflation 이었었다.

전쟁중에 임금동결과 물가통제령이 시행되던 동안 충실하게 불만을 억제해오며 공장들이 가동되도록 협조해 오던 노동자들은 종전후 그간 억제되어 왔던 임금인상을 강력하게 요구하기 시작 하였었다. 전국적인 철도 노조의 파업이 시작되자 수송망이 전국적으로 마비되기 시작하였을때 광산노조들도 파업을 시작하였었다. 아직 산업의 동력이나 난방들이 석탄에 많이 의존하고 있던 시절이었었다.

국가적 위기에 당면한 Truman 대통령이 철도와 광산들을 몰수하자 광산노조의 파업은 곧 타결 되었었다. 그러나 철도산업에 종사하는 18개 업종의 노조들이 쟁의타협을 받아 드리기로 동의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기관차 기수와 또 다른 열차노조원 조합들이 합의를 거부하자 철도산업은 계속 마비 될수밖에 없었었다.

이와같은 사태에 격분한 Truman 대통령은 국회에 국가위기 명령을 발동할 권한을 요청하였었다. 국가위기령이 발동된 후에도 파업을 계속하는 파업노동자들은 여러가지 고용혜택을 잃게되고 장기근속 혜택도 못받게 되고 군대에 징병 될수도 있는 강경한 조치이었다. 하원은 대통령의 위기령선포에 곧 동의 하였는데 상원이 동의여부를 심의하고 있는 동안에 철도노조 파업이 중지되었었다.


종전후에 생겨나는 새로운 변화들은 정치에도 심각한 영향을 주었었다. 1946년에 있었던 중간선거에서 “Had enough?” (‘이대로 더 이상은 않됩니다’) 라는 구호을 내세우고 선거운동을 했던 공화당은 1928년 이후에 처음으로 제80차 국회 상하원의 다수당이 되었다.

여소야대의 정국이 되어 Truman 대통령은 정치적으로 많은 제약을 받게되었다. 이 선거의 결과는 제2차대전 발발전까지 계속되었던 New Deal 정책들에 대한 국민들의 실증도 반영된 것으로써 정부의 규제와 간섭을 줄이고 너무 과대해진 정부의 권한을 줄여야 하겠다는 많은 국민들의 정서가 반영된 것이라고 할수도 있었었다.

종전후 임금수준이 올라가자 소비자들은 전쟁중에 생산이 절감되었던 냉장고, 자동차등 소비물자를 모두들 구입 하고자 하였다. 평화시 경제체제로 바뀌어 가고 있던 1946년 47년 동안에 생필품 도매가격은 25%나 올라 갔었다고 한다. Truman 은 전시중에 시행되었던 물가통제를 계속하고자 하였으나 국회가 동의하지 않았었다.

공화당을 이끌고 중간선거를 지휘했던 사람은 William Howard Taft 대통령의 아들인 Robert A. Taft 상원의원이었다. 그는 명석하고 양심적인 사람이었으나 타협이 없는 보수성향의 정치인이었다. 그는 미국이 국제문제에 개입하는 것을 줄여야 한다고 생각했었고 정부의 규율과 권한이 축소 되어야 한다고 주장 하였었다. 또 국내의 모든 문제들이 법률로써 해결될수 있다는 FDR 의 New Deal 적 정책은 옳지 않다고 말하면서 미국의 정치, 사회, 경제의 성장은 모두가 정부의 규제와 간섭이 최소화해서 국민이 자유스러웠을때 이루워진 것들이라고 주장하였다.

미국민들이 너무 빈번한 노조의 파업들에 시달리고 노조의 부패가 폭로되고 일부 노조에 공산주의 사상이 침투해 들어가고 있다고 의심까지 받게되자 반노조 정서가 퍼지기 시작하였다. 국회는 노조의 이기적인 파업을 억제하기 위해서 Robert A.Taft 상원의원과 Fred A.Hartley, Jr. 하원의원이 주동이 되었던 Taft- Harley Act 를 1947년에 통과시켰다.

두의원들의 원안보다는 훨씬 유화된 법률이었지만 노동자들은 이 법을 “악성 노동노예법” 이라고 반대 하였었다. 이 법은 노사간의 분규가 양측이 균형된 힘을 가지고 타협으로 해결할수 있도록 하는것이 목적이었다. 노조의 활동을 일부 제약 함으로써 노조의 우격다짐식 파업을 줄여 보고자 하였다.

이 법은 노조회원만이 채용될수 있는 관행을 금지 시켰으나 채용후 노조원이 되도록 요구하는 것은 금지 시키지 않았지만 각주는 주의 법률로써 노조가입을 요구하는 관행도 금지 시킬수 있도록 하였다.

<조태환/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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