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183 )제2차 세계대전과 FDR 대통령 ⑪

2017-11-17 (금) 조태환/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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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3월 7일에 부름을 받고 Rommel 이 Hitler를 찾아갔더니 “이제 Africa 에서 손을 떼어야 하겠오” 라고 얘기 했었다고 한다. Rommel 이 “그러면 앞으로 전쟁은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까?” 라고 질문하자 Hitler 는 “전쟁을 끝내려면 소련이던 서방 유럽 국가들이던 간에 평화협상이 있어야 할텐데 어느 쪽도 우리와 협상을 하려고 하지 않는 다오” 라고 애매한 대답을 했다고 한다.

아마 이때 쯤에 Hitler 는 Nazis 의 종국적인 패망을 예감하고 있었던 듯하다. 5월 12일에 Tunisia 에 포위당해 있던 Axis (주축국군) 사령관 Hans-Jurgen von Arnim 장군은 영국군에게 항복하였다. 그와 그의 수하 장군 16명들은 25만명의 주축국군 장병들과 함께 포로가 되었는데 그중에는 가장 잘 무장된 독일 정예군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결정적인 패배는 이태리의 사기가 엄청나게 떨어지게 만들었다.

미국과 영국은 1943년초에 있었던 Casablanca 회담에서 승전할것으로 예상하고 있던 Tunisia 의 Nazis 섬멸이후의 전략에 대해서 이견이 있었다.


미국은 1943년에 불란서를 침공하자고 하였으나 영국은 지중해 전쟁을 승리로 끝내기 위하여 Sicily 를 점령하고 이태리를 완전히 굴복 시키자고 하였는데 영국의 제안이 채택 되었고 앞으로는 태평양 전쟁에 주력하기로 하였다. 양국은 모든 적국들이 무조건 항복을 할 때까지 전쟁을 중단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이 발표가 전쟁을 장기화 되도록 만든 전략적 착오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이태리를 남부에서 부터 침공해 올라 가기로한 비밀전략을 실행하게 되었었다. 1943년 7월 10일 이른 아침에 미영국군 25만명이 Sicily해안 150 마일에 상륙하였는데 그때까지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상륙작전이었다.

그러나 작전상의 허점으로 Sicily 에 있었던 독일군과 이태리군 대부분이 이태리 본토로 탈출하여 버렸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이태리 국민들은 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전쟁에 신물이 나서 Mussolini 를 쫓아내고 새 정부를 수립하였다. 7월말 부터 이태리는 연합국측에 평화협상을 제의해 오기 시작하였다. 많은 흥정을 하던 끝에 이태리는 9월 3일에 정전협정에 서명하였다.

그러나 정전협상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에 Nazis 는 최후까지의 접전을 위해 병력을 이태리에 투입하였다. 미영국군들이 지도에 발가락들 처럼 보이는 이태리의 서남단에 상륙하면서 독일군의 강력한 공격을 받았다. 독일군들의 지속적인 저항으로 연합군들은 1944년 6월 4일에야 로마에 입성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도 독일군은 완강히 저항하였으며 미군은 2차대전중 가장 많은 7만명이 이 전투에서 전사 하였다고 한다. 미영국과 기타의 연합군들의 혈투로 독일도 23개 사단을 투입하게 되어서 모든 타지역의 Nazis 병력이 약화 되었다고 한다.

“미영의 무차별폭격으로 독일민간인 33만명사망, 영불해협상륙작전 가짜정보 유포”
영국을 지속적인 공습으로 괴롭혀 왔고 Blitzkrieg 전법에서 공습폭격을 효과적으로 써왔던 독일은 미국이 본격적으로 참전하면서 영국과 미국의 무자비한 공습 폭격으로 생산과 전투능력이 약화되고 국민들의 사기가 많이 저하되었다.

1944년에 지상에서는 미영국군들의 불란서 침공이 서서히 진행되고 있었지만 독일은 내륙이 깊숙히 공습으로 파괴되고 있었다. 이미 진주만 공격은 현대의 전쟁의 성격이 근본적 으로 달라진 것이었음을 미국 사람들에게 잘 보여 주었지만 이제는 전쟁중 아무곳이나 “전장”이 될 수가 있으며 민간인들도 군인들처럼 공습을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주 높이 날아오는 까닭에 눈에는 보이지도 않고 날아오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폭격기들이 민가들과 공장들을 폭격하였다. 영국의 폭격기들이 1941년부터 4만6천톤의 화염폭탄을 밤에 독일의 도시들에 무차별적으로 투하하여 전도시를 불바다로 만들어 버렸으나 명중율도 높지 않았지만 그대신 폭격기의 피습도 많지 않았다.


미국은 1942년 8월 부터 낮에 공습을 하였음으로 명중률이 높았으나 폭격기도 피습을 많이 당하였다. 수많은 기관총으로 중무장 되어서 “날아다니는 요새” 라고 생각 되었던 B17 폭격기가 독일의 전투기들에게 너무 자주 피격 당하기 시작하자 미국은 장거리 비행 전투기를 만들어서 B17 폭격기들을 보호하게 하여 폭격을 계속 하도록 하였다. 독일의 하늘에서는 비가 오듯이 폭탄들이 떨어졌다.

독일도 missile 인 B1 이라는 “날라가는 폭탄”을 만들었으며 B2 라는 rocket 폭탄을 만들어서 1톤짜리 폭탄을 투하하게 하였다. 역사상 WW II 때처럼 민간인들의 피해가 많았던 전쟁은 없었다.

그러나 공습폭격으로 전쟁이 중지되지는 않았었다. 독일의 공장들은 계속해서 비행기와 다른 무기들을 대량으로 만들어 내었다. 다만 연합국들의 지속적인 공습은 독일이 자국의 방어에 급급하도록 만들어서 공격용 무기들을 생산하는데 지장이 있도록 하는 효과는 있었다. 연합국의 공습으로 독일 민간인 33만명이 사망하고 민가 5백만 채가 파손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1944년까지 연합국은 무차별적 공습을 하였으나 독일의 생산능력에 큰 지장을 주지 못하였다.

1944년부터는 비행기, 탱크, 트럭, ball bearing, oil과 gas 등을 생산하는 군수물자 생산공장들을 특정 목표물로 폭격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독일이 공습을 예상해서 생산공장들을 사방에 분리해서 세워 놓았던 까닭에 철도와 도로 들을 폭격하여 생산과정을 마비시켰다고 한다.

미국과 영국은 1944년 6월에 영불해협 (English Channel) 을 건너서 불란서에 상륙 하기로 비밀협약을 하였다. 이 협약은 WW II 중에 맺어진 가장 중요한 특급 비밀로써 끝까지 보안이 잘 유지된 전략이었다.

이 연합군은 Supreme Commander of the Allied Forces in Western Europe
이란 직함을 가지고 미국의 Dwight D. Eisenhower 장군이 지휘하도록 하였는데 불란서 남쪽해안을 침공하는 이 상륙작전은 이태리에게도 최대의 위압을 동시에 주는 것이었다. 독일이 이러한 상륙작전이 있을것을 예상하고 지난 4년 동안 해안선 방어무장을 철저하게 해놓고 병력도 배치해 놓았던 까닭에 이 상륙작전은 아주 위험한 것이었다. 독일은 불란서에 총 58개의 사단을 주둔시켰었다.

다만 언제 어디를 침공하느냐 라는 전략적 선택의 기회는 연합국이 쥐고 있었고 연합국측은 불란서안에 있는 지하저항군 FFI (French Forces of the Interior) 의 생명의 위험을 무릅쓴 협조를 기대하고 있었다.

연합국측은 진짜 상륙작전은 철저한 비밀속에 계획하고 준비했어야 했지만 독일도 예상하고 있는 공공연한 비밀인 “상륙작전”에 대해서는 독일에게 가짜 정보를 흘려주어 그들을 혼동시킬 필요가 있었다.

영불해협에서 영국에 가장 가까운 불란서지역은 Paris 에서 북쪽으로 150 마일이 떨어진 Calais (켈레이) 인데 영불해협을 잘 아는 모든 사람들은 만일 연합군의 침공이 있다면 반드시 Calais 로 오게될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는데 가장 중요한 사실은 Hitler 가 Calais 로 연합국이 침공해 올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점이다. 독일의 장군들 중에는 Calais 에 모든 방어준비를 하고 있는 것에 반대했던 사람들도 있었는데 Hitler 의 주장에 Rommel 장군까지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연합국측은 독일이 듣고 있을 radio로 Calais 를 침공할 준비가 되고 있음을 시사하는 방송를하고 George Patton 장군이 지휘할 미국 제1군이 침공할 것이라고 암시한 뒤 제1군 견장을 붙인 미군들이 영국쪽에 많이 눈에 뜨이도록 했다고 한다.

<조태환/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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