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174)제2차 세계대전과 FDR 대통령 ⑤

2017-10-06 (금) 조태환/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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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ke 는 New Deal 정책들에는 반대 하였지만 미국이 영국을 도와 주어야만 한다는 점과 불의한 침략국가들에 대비하여 미국이 무장을 강화해야 한다는 점에는 FDR 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볼때에 국제 외교에서 미국의 고립주의자들이 원했던 것 만큼 두 후보들 간에 근본적인 차이가 없었던 점은 다행한 일이었다. 한 예를들자면 그해 6월에 FDR 은 징병법을 제안하였는데 Wilke 의 지지로써 9월에 입법이 될 수 있었다. 21세부터 35세까지의 남자들이 등록하도록 되어있던 이 법으로 한번에 90만명 씩까지 징병할 수 있게되었고 1945년 5월에 폐지 되도록 되어 있었다.

FDR 은 법률해석을 최대한으로 해가면서 합법적으로 영국을 도와줄 방법을 연구한 끝에 미국이 군수물자를 민간업체에 팔아서 영국에 되팔도록 하였다. 그러나 Churchill 로 부터 “보내주시는 군수물자는 감사하오나 독일 잠수함 덕택에 배달이 전부 용궁으로 되고 있으니 기왕 도와주시는 김에 독일의 잠수함들을 모두 낚아 버리도록 구축함도 몇척 보내주셔야 쓰겄오!” 라고 긴급한 전보가 와서 FDR 은 곤경스러워졌다. Churchill 과 FDR 은 동맹국의 원수들이라는 점이외에 인간적으로 서로 존경하고 친분이 아주 깊었다고 한다.

위대한 정치인답게 정략에도 능숙했던 FDR 은 “Destroyer for Bases” 라는 “전략”을 발표했다. 내용인즉슨 “미국의 방위를 위해 필수적인 동맹국에게 필요한 군수물자를 도와주고 미국도 상응한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평범해 보이는 것이었다. 이 전략에 Wilke 가 이의를 제의하지 않겠다는 사전약속이 있었다고 한다.


그해 9월에 FDR 은 낡기는 하였지만 충분히 실전에 사용될수 있는 구축함 50척을 영국에 양도하고 그 대가로 Newfoundland 에서 British Guiana 에 이르는 대서양 연안의 해군기지 여덟개를 미국이 쓸 수 있도록 하였다. 영국은 혹시 영국해군이 항복을 하게 되더라도 이 구축함들이 독일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하였다.

FDR 은 1940년의 선거에서 1936년 같은 역사적인 기록은 아니지만 다시 압승하며 미국 최초의 3선 대통령이 되었다. Wilke 는 투표자 45%의 지지를 받았지만 선거인단 표수는 82표로 10개주에서 승리하였고 FDR 은 선거인단 표수 449표를 받았다.

세 번째 대통령으로 취임한 FDR 은 새로운 난제를 해결해야 했다. 영국은 군수물자를 사들일 돈이 바닥이 났고 미국도 도와줄수 있는 군함이 바닥이 나 가고 있었다. 만일 미국의 중립법이 개정되지 않는다면 영국이 패망하기 전에 미국이 도와줄 수가 없게 되는 난처한 입장이 되어가고 있었다.

타협과 설득의 명수이었던 FDR 은 한번 더 그의 정치력을 발휘한다. 그는 “Lend/Lease” 라는 정책을 발표한다. “대통령이 미국의 국방을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영국을 포함한 나라들에게 미국은 필요한 무기와 군수물자를 장기 또는 단기적으로 대여해 줄 수 있다” 라는 것이었는데 이 정책으로 미국은 영국에게 군수물자를 “판매”하지 않고 “대여”해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중립법의 제약을 피해가면서 영국을 구원하는 묘책이었다.

1941년 1월에 FDR 은 국회에 보낸 연두교서에서 전쟁이 끝난 후에는 이 세계가 “언론의 자유, 종교의 자유, 결핍으로 부터의 자유, 공포로 부터의 자유” 등 4대 자유를 향유할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고 말하였다.

같은해 말쯤에 FDR 과 Churchill 은 Newfoundland 해안에 정박중인 군함에서 비밀회의를 하고 The Atlantic Charter 를 발표 하였는데 그 내용은 오래전에 발표된 Woodrow Wilson 의 “14 Points” 를 현대화한 것이 었었다고 한다.

침략자들의 기세는 점점 등등해지고 유럽 도처에서 전쟁의 불길이 타 올라가고 있었으나 미국민들의 정서는 아직도 “중립, 전쟁회피” 이었다. 더군다나 FDR 은 선거말미에 Wilke 후보의 무책임하게 강도가 높아진 유세를 반박하기 위하여 “반복, 반복, 반복해서 말씀 드립니다만 우리들의 아들들을 외국의 전장에 결코 보내지 않겠읍니다” 라는 “공약”을 해두었던 터이었다. 그러나 서서히 뒷걸음질 치고 있는 미국에게 전쟁은 앞에서 성큼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FDR 은 1941년 4월과 7월에 우선 최소한의 방위전략으로 북대서양에 있는 Denmark 영의 Greenland 와 Iceland 에 미군을 주둔시켰다. 그해 7월 17일에 미국국회는 행정부 에게 미국내에 정박중인 적성국가 선박 92척을 압류할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이들 “적성국가” 에는 독일, 이태리 뿐만 아니라 독일에게 점령당한 불란서, 화란, Norway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6월 14일에는 미국소재의 독일과 이태리의 재산들이 동결되었다.

6월 22일에 Hitler 는 치명적인 전략적 실수를 범했다. 쏘련을 침공한 것이었다. Hitler 는 소련을 유태인 Bolshevik 가 실권을 잡았고 공산주의는 독일의 적임으로 열등민족인 Slav 사람들을 굶어죽게 하거나 소련의 비옥하고 광활한 지역에서 쫓아낸후 Master Race 인 독일인들이 살아야 한다는 집념을 가지고 있었다. 100년전에 Napoleon 이 서뿌른 러시아 침공끝에 불란서 제국이 멸망하게 되었다는 역사적 교훈을 Hitler 는 미처 배우지 못했었던 듯하다. 유럽에서의 전쟁은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으로 Paris 를 점령한지 꼭 일년만 이던 6월 22일에 Blitzkrieg 전술을 써서 폭풍처럼 Moscow 에서 15 마일되는 지점까지 진격해 들어 갔다.

몇 달 안에 전투가 끝나버릴 것으로 예상해서 여름군복과 장비들만 가지고 갔었다. Hitler 는 쏘련에는 군복을 입은 장병들보다도 훨씬 더 무서운 무기가 있는것을 미처 몰랐었다. “동장군”이 수백만명의 병력보다도 더 무서운 위력으로 급습했던 것이다. Nazis 군인들의 손발은 엄청난 추위로 오그라 들었었고 Oil 이 얼어붙어 tank 를 움직일수가 없었다. Hitler 는 소련에 수백만명의 인명피해와 엄청난 재산상의 파괴만 남겨둔 채로 그해 12월초에 황급히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한편 독일은 대서양에서 잠수함 작전을 더욱 활봘하게 전개하고 있었다. 미국해군은 미국상선들을 호위해 오고 있었다. 1940년 9월 1일 부터는 영국의 선박들도 호위하기 시작하였는데 9월 4일에 미국의 구축함 Greer 호가 독일 잠수함의 공격을 받았다. FDR 은 미해군에게 앞으로는 독일 잠수함을 발견하는대로 침격 시키라는 새 명령을 내렸다. 물론 FDR 은 Greer 호가 피격당시 독일 잠수함을 따라다니며 잠수함의 위치를 영국에게 알려주고 있었다는 얘기는 미국 국민들에게 하지 않았다.

FDR 은 미국의 상선들 에게도 무장을 하도록 명령 하였으며 미국상선들이 교전국들로 항해해도 된다고 허락하였다. 10월 17일에는 미국 구축함 Kearny 호가 독일 잠수함의 공격으로 심각하게 파손되고 해군 11명이 전사하였다. 10월 31일에는 미국 구축함 Reuben James 호가 독일 잠수함의 공격을 받아 침몰되고 승무원 절반이 전사했다.

이제 미국은 대서양에서 선전포고 없이 전쟁에 돌입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미국이 공식적으로 선전포고를 하고 제2차 세계대전에 정식으로 참전 하게 만든 것은 독일이 아니고 일본이었다. 1940년에 일본은 독일과 이태리의 동맹국이 된다. 일본은 “대동아 공영권” 을 설립한다는 미명으로 태평양의 새 깡패로 등장한다. 유럽에서 독일이 거침없이 승승장구하는 것을 본 일본은 Asia 에 있는 석유, 고무등 귀한 자연자원이 풍부한 불란서, 화란, 영국 등의 식민영토들을 탈취하고 아마 중국까지도 손아귀에 넣을 수 있으리라는 간이 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조태환/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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