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176)제2차 세계대전과 FDR 대통령 ④

2017-09-29 (금) 조태환 /LI 거주
크게 작게
5월초에 독일은 Netherland, Belgium, Luxembourg 를 점령한후 “철통같은” 마지노선 을 완전히 피해서 불란서를 깊숙히 침공한후 6월 14일에는 수천명의 시민들이 길에 나와 눈물을 흘리고 있는 가운데 Nazis 의 군화가 Paris 를 행진했다. 그후6월말에 불란서는 항복했고 불란서 중부에 있는 Vichy 에 독일의 괴뢰정부인 Vichy 정부가 설립된다. 이제 전장은 유럽 전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바다에서 독일의 잠수함이 무법자가 되었던 것차럼 Blitzkrieg 는 기존의 육상전쟁 법칙을 송두리채 뒤엎어 버렸다. 미육군에는 미래의 전술방법에 획기적인 변화가 머지않아 반듯이 찾아올 것임을 예측했던 Billy Mitchell 이란 육군준장이 있었다.

이미 1860년대 초반이었던 남북전쟁때와 1898년의 미서바나 전쟁때에 정찰용 비행선 들이 쓰여 졌던적이 있었지만 그때까지 비행기는 스포츠나 취미생활의 관심수준을 벗어 나지 못하고 있었다. Mitchell은 젊은 통신장교이던 1913년부터 비행기의 비행 무기화에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1918년에 그는 제1차 세계대전중에 제3군의 Pershing 장군휘하의 항공대장 으로써 영국과 불란서군들의 비행기 사용을 보고 많은 감명을 받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미국의 육군장성들과 해군제독들은 비행기란 새로운 기관총 처럼 육군이나 해군이 전투에서 보조로 사용 해야할 신무기 정도로만 생각하고들 있었다. Mitchell 은 장차 비행기는 육군과 해군을 무력하게 만들것이며 적의 심장부를 폭격하여 적의 생산능력을 파괴시키고 적의 전쟁의지를 말살하게 될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비행기만을 사용하는 “공군” 같은 별개의 군대가 창설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자기의 주장을 실험으로 보여주기로 하였다. 당시에는 해군의 전함은 아무 무기로서도 파괴할수 없는 것으로 생각되던 시대 이었었다
. 그는 1921년에 WW I 종전후 독일해군 에서 압수해온 큰 전함 한척을 Virginia 해안에서 60마일 떨어진 바다에 띄어놓고 85마일이나 떨어진 장소에서 출발한 폭격기 몇대가 2천톤짜리 폭탄 여섯개로 그 전함을 폭격하게 하였다. 전함은 20분만에 완전히 바다속 깊히 침몰 하였었다. 천하무적 전함이 비행기에 의해 침몰된 역사적인 첫 실험이었었다. 그러나 육군이나 해군의 지도부가 그후에도 꿈적도 하지 않는것을 보자 Mitchell 은 각종의 언론에 자기의 주장을 기고하기 시작하였고 종내에는 군부 지도자들의 무능이 “국가반역”의 지경에 이르러 있다고 까지 비난 하였었다. 그는 결국 1925년에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대령으로 강등되고 5년간의 정직처분을 받았었다.


그가 1936년에 사망한후 결국은 육군소장으로 추서 되었으며 지금부터 70년전인 1947년 9월에 “미공군” 이 창설되었다. “미공군의 아버지” 라고도 불리우는 Mitchell 은 흔히 시대에 한발 앞선 사람들이 억울하게 받는 “선구자벌” 을 받았지만 그의 시의 적절 했던 공로는 미국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한편 해군에는 해군 항공대장인 William Moffett 제독이 있었는데 그는 Mitchell 과는 대조적인 성격으로 조용한 말로 해군지도자들을 설득하고 다녔었다. 그는 결국 미국 해군이 항공모함을 건조하고 전함과 순양함에 실고 다니던 폭격기를 활주로가 없이 새총을 쏘는것 처럼 날려보내는 Catapult 라는 장치를 이용해 출발 하도록까지 만들었다. 미해군은 WW II 때 태평양 전쟁에서 결정적인 공헌을 하게된다.

그 보다 몇해전인 1927년에 Charles Lindbergh 가 Paris 에서 New York 까지 무착륙 직행 단독 비행에 성공 하자 비행기의 무서운 무기화 가능성를 미국 전국민들이 깨닫게 되었었다. 드디어 공군은 1947년에 창설되었지만 1935년에는 명중률이 높은 타격능력을 가진 “날아다니는 요새” 라고 불리웠던 B17 장거리 폭격기가 제조되어 하늘을 나르게 되었다. 그때부터 “전투”라는 말의 의미가 근본적으로 달라 졌었다.

FDR 은 독일이 불란서를 침공하기 이전부터 독일의 세계정복 야욕을 감지하고 있었다. 그는 1940년에 국회에 보낸 특별교서에서 1941년부터 Nazis 가 섬멸될때 까지 매년 비행기 5만대를 생산 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고 대서양과 태평양등 양 대양 해군함대의 완성을 위하여 수십억불의 예산 책정을 해줄것을 국회에 요청하였다. FDR 은 만일 영국이 미국의 구원을 제때에 받지 못하면 당장 1940년에 패망할수도 있음을 알고 있었는데 중립국가론 을 주장하고 있던 미국국민들의 생각을 바꾸어 놓는것이 그의 가장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 Winston Churchill 영국수상은 국회에서 “불란서는 항복하였고 이제 세계의 장래는 영국에게 달려 있습니다.

만일 대영제국이 앞으로 천년을 더 건재하게 될지라도 역사는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중요했던 시대이었다 라고 기록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워진 이 중차대한 책무를 완수하도록 하십시다” 라고 역설하였다. Hitler 는 1940년 여름과 가을내내 London 과 기타 중요 도시에 수백대의 폭격기들을 보내어 막대한 재산과 인명의 피해가 나도록 하였다. 그는 재무장을 한 미국이 영국을 구원해 주기 전에 영국이 항복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 총력을 다 하였다.

다행히 영국은 독일의 최극비 암호문자를 해독할수 있는 Ultra 라고 불리우던 기계를 발명하여 RADAR (Radio Detecting and Ranging) 와 함께 씀으로써 독일의 폭격기들 몇대가 어디로 오고 있는지를 알수 있었었다. 영국은 이 정보에 따라 전투기들을 옮겨 놓았다가 독일의 폭격기 들을 공격 하였었다고 한다. 영국이 Ultra 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영국의 최고 국가기밀 이었다.

1940년 11월 14일에 Churchill 은 독일이 영국 최고의 문화도시인 Coventry 를 폭격 하려 오는것을 알고 있었으나 Ultra 의 비밀보존을 위해서 아무에게도 통보하지않아 그날밤 14세기에 지은 가장 큰 성당을 포함해서 천여채의 집들이 폭격을 맞고 수백명의 사망자가 생겨 났었다. 만일 독일이 Ultra 를 영국이 가진것을 알면 암호를 바꿀것을 방지하기 위해 영국이 치른 참혹한 댓가이었다. 그해 가을에 Hitler 는 해협을 건너 영국을 침공하려던 계획은 철회 하였으나 공습은 겨울내내 계속하였었다.


영독간의 전쟁이 치열하게 계속되고 있던 동안에 미국은 1940년의 대통령선거를 치루게 된다.

미국의 대통령 선거기간동안 “전쟁 Time Out!” 을 Hitler 가 해줄리가 없는 터이라 FDR은 반전주의 국민들을 이끌고 선전포고도 없이 진행되고 있는 전쟁을 치루느라고 고전하고 있었다. 1940년 6월에 공화당은 가장 유력한 대통령후보이었던 뉴욕시의 Thomas E. Dewey검사장을 여섯번째 투표에서 물리치고 Commonwealth and the Southern 이라는 전기회사의 사장이었던 정치신인 Wendell Willkie 를 대통령후보로 공천하였다.

그는 Harvard 출신의 FDR 과는 대조적으로 미국 중서부 사투리를 써가면서 자수성가한 평범한 사람인것 같은 인상을 주었는데 막대한 공적자금이 투자되는 FDR 의 New Deal 정책들을 싫어해서 1940년에 평생의 당적을 민주당에서 공화당으로 바꾼 사람이었다. 그는 전기 회사 사장이었을때 TVA 가 사기업 전기회사들과 불공평하게 경쟁하고 있다고 불평 하여 왔었다. 그러나 그는 FDR 의 정책들을 무조건 반대하던 당파적인 정치인은 아니었었다.

같은해 7월에 민주당이 FDR 을 대통령후보로 다시 공천 했던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 겠지만 정작 놀랠 일은 그가 미국 역사상 최초의 3선 대통령후보가 된 것이었다.

<조태환 /LI 거주>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