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군함도’는 일제 강점기 강제 징용 되어 인간 이하의 학대를 받으며 지하탄광에서 석탄을 캐다가 최악의 상황에서 목숨을 건 집단 탈출을 그린 우리의 가슴 아픈 근대사의 한토막을 다룬 역사극이다.
더 정확한 시대 배경은 1945년 8월 6일의 히로시마 원폭투하와 그 사흘후 8월 9일 나가사키에 두번째 4.5톤의 원자폭탄을 투하했던 그 동안까지 있었던 거의 일년을 거쳐 14만명이 목숨을 잃은 전쟁사에서 가장 처참한 기간이다.
‘군함도’의 원지명은 ‘타까시마섬’으로나가사끼(그 당시 거대 군수기업 미쯔비시의 자본으로 일구어진 군수기업 기지가 있었음) 항구 도시에서 18.5kM떨어져 있던 섬으로 일본 최대의 해저 탄광으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위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흡사 대형군함으로 착각할 정도이고, 축구장 두개를 합한 정도의 면적에 5000명 이상을 수용하기 위해 굉장히 정밀하게 설계된 그 당시로는 현대식 아파트를 3/4정도의 대지에 빼곡이 채워 놓았고 섬 전체가 거의 방파제 절벽으로 둘러막혀 넘어 뛰면 바로 바다로 빠지게 되어 있었다.
‘군함도’가 알려지고, 사람들의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작가 한수산씨의 소설 ‘군함도’에 힘입은 바가 크다. 내가 워낙 좋아하는 소설가이고 그가 거의 30년 가까이 자료수집과 현지탐방을 위해 세월을 보내고, 역사적 사실에 근접하려 노력했다는 소릴 듣고 책이 나오자 마자 1,2권을 사서 단숨에 읽었다.
흥미로운 소설로써 보다 그의 역사적 사실의 자료들, 그 방대함, 나가사키 원폭의 피해를 눈에 보는 듯 그려, 읽는 나로 하여금 그 비참함을 실감하며, 원자탄 전쟁은 다시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핵전쟁 반대론자가 되게 만들었다. 영화의 내용은 소설보다 훨씬더 간단했다. 강제징용으로 끌려간 500-800명 노동자들이 탄광 지하 1000M 막장에서 석탄을 캐며, 지옥 같은 삶을 사는 모습, 그 속에서도 친일파 적인 사람들과 아닌 사람들의 다툼, 드디어 반란을 일으켜 400여명이 탈출하는데 성공하는 이야기다.
귀환자중 살아계신 분들이 6명이고, 그 중 한분인 이인우(94)씨는 그때를 회상하며 “팬티만 입고 지하 탄광에서 10시간 일하고 올라오면 눈과 이만 빼고 새카맸어요.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몸서리가 쳐져요”라고 말한 것 처럼, 영화는 석탄으로 새카맣게 분장한 배우들의 모습으로 가득차있다.
류승완 감독은 실제 역사속에 없었던 400여명의 집단탈출을 어느 전쟁영화 못지않게 스릴과 서스센스로 관중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 넣는다. 이런 고발성을 띤 영화나 소설을 통해, 사람들은 역사를 배우고, 그 심각성이나 참상을 느끼고 깨닫게 된다. 문제가 되는 것은, 작가나 감독이 얼마나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고 변질되지 않게 옮기느냐, 흥미와 재미를 생각하며 드라마타이즈해서 역사를 지나치게 왜곡시키느냐 하는데 있다.
그 사이에 균형을 잘 잡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 ‘군함도’를 읽을 것을 추천한다. 일본은 아직도 독도를 자기들 것이라 주장하며, 위안부 보상문제도 엉터리로 마무리 지우려하며, 이번에 안 사실이지만, 우리나라가 유일하게 일제의 강제 징용 피해를 당한 국가 중에서 개별 보상이 이뤄지지 않은 나라라는 것을 알게 된 이 시점에서, ‘군함도’는 적시에 국민과 정부에 과거를 옳바로 바로 잡는 것에 도전하도록 하는 계기를 만들것이다.
이러한 분명한 과오의 역사가 있는데도, 계속 그릇된 역사를 바르다고 주장하며 그들이 옳다고 고집하는 일본을 우리는 어떻게 할것인가?국민정서 밑바닥에 흐르는 반감과 원한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최근에 읽은 강남순씨의‘용서에 대하여’에서 답을 찾아보자. 그녀는 마지막 5장에서 용서를 ‘용서의 정치:조건적용서’와 ‘용서의 윤리:무조건적 용서’로 구분한다.
전자는 아렌트가 주장한것으로, 가해자의 참회,반성,보상,처벌들이 용서의 전제조건이며, 그것들이 성립되지 못하면 용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후자는 데리다가 주장하는 것으로 “용서는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무조건적 용서가 진정한 용서라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 기독교적 관점에서 지지 받을수 있는 이론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국가적인 정치적 차원에서는 일본에 대하여 조건적 용서를 적용시켜 나가되 국민의 마음속엔, 무조건적 용서를 받아들여, 개인적으로는 우리와 똑 같은 사랑을 주고 받는 형제.자매로 그들을 대해야 될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속엔 용서가 먼저 와야되기에 무조건적 ‘용서’ 또한 우리에게 주어진 명령이다. “만약 용서할 만한 것만 용서하겠다고 한다면, 용서라는 바로 그 개념자체는 사라지게 될것이다.(…) 용서는 오직 용서할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다.”(자크데리다Jacques Derri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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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남수 목사/ 행복연구원 길라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