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167)제32대 대통령 Franklin Delano Roosevelt ⑥

2017-07-28 (금) 조태환/LI 거주
크게 작게
미국 농업부문의 낙후성에 대해서 이미 여러번 언급하였다. 다른 산업보다 자연조건에 의존도가 높은 농업은 정부의 인위적인 정책만으로서는 많은 문제점들을 짧은 기간동안에 다 해결하기는 어려운 것이었다. 농업부문의 낙후원인은 다양하고 복잡한 것들이었다.

흑백인들 상관없이 소작농 (Sharecropper) 을 하던 농민들은 지주의 “착취”로 계속 매년 늘어가는 빚에 짓눌려 살았으며 정부에서 농민들에게 주는 혜택도 받지 못하였다. 예를 들어서 FDR 이 과잉생산을 방지하기 위해서 AAA 법으로 농토를 휴유시키는 지주들에게 현금으로 보상해 주기 시작하자 많은 소작농들은 소작해 오던 땅에서 쫓겨나는 일이 일어났다. AAA 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부작용이 생긴 것이었다.

영세농민들은 값비싼 농기구들을 사지 못해 효율성이 낮았으며 돈이 없어서 충분한 비료를 쓰지도 못하였다. 농업은 자연의 제약에서 벗어날수 없는 것으로 보였었다. 그러한 고난중에 1930년대에 그야말로 옥토가 강풍에 다 날아가 버리는 대사변이 있었다.


북쪽으로는 Canada 에서 부터 남쪽으로는 Mexico 에 까지 이르는 미국 중서부의 19개 주들은 1920년대에 계속된 충분한 강우량 덕택에 원래는 잡초들만 무성했던 지역들을 전부 농토로 개척한 땅들이었다. 그러나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몇 년간 극심한 한발이 계속되었다. 재배한 농작물들은 다 고사해 버리고 사육하던 소떼들과 가축들이 모두 목이 마르고 먹지를 못해서 죽어가는 재변이 일어났다.

왕성한 풀밭이었을 때에는 가끔 한발이 오더라도 풀들이 물을 땅에 보존시켜 주어 왔었으나 모든 땅이 농토가된후 한발에 곡물이 말라 고사해 버리자 뿌리를 내려서 수분을 보관하고 땅을 보존해주던 식물이 없어서 농토들은 말라서 쩍쩍 갈라 졌었다가 드디어 흙으로된 사막과 같아지기 시작하였다.

이와 은 지경에 Dust Storm 이라고 불리는 강풍이 계속 불어오기 시작하자 농산물을 심어야 할 Top Soil 이 바람에 다 날려가서 동부주들의 하늘까지 해가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먼지가 되어서 날아갔다가 대서양에 떨어지는 천재지변이 일어났다.

생계를 유지할수 없게된 농민들은 자동차에 짐을 싣고 사방으로 흩어져 갈수밖에 없었다. 살곳을 찾아 중서부주들에서 California 로 많은 사람들이 몰리자 California 주는 1939년에 “이주”금지법을 입법 하였으나 연방 대법원이 2년후에 이 법이 위헌이라고 판결 하였다.

FDR 은 직접 손에 흙을 무치고 등에 땀을 흘렸던 농사꾼은 아니었지만 Hyde Park 에서 대대로 내려온 부농의 아들로써 농업에 관심이 많았고 농토보존 방법들도 알고 있어서 농업개발과 농민보호에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는 비과학적인 방법으로 무리한 경작만 해오면 농토가 박토가 된다는 것과 다른 곡물을 가끔 교대해서 심고 Top Soil 을 잘 보존해 주어야 함을 알고 있었다.

오랜동안 개량이 없어서 박토가 된 땅에는 나무들을 심어서 땅을 먼저 살려 놓으면 후일 다시 농토로 변할 수 있는것을 체험으로 알고 있었다. 나무들은 강풍이 불더라도 땅을 보존해 주었다. 정부에서 얻어오는 종자와 묘묙으로 2억 주의 새 나무들이 Dakota 에서 Texas 에 이르는 중서부 지역에 심어졌다.

전문가들은 이 지역들에서는 나무도 자라지 않을것이라고 했었으나 새나무들은 잘 자라서 강풍을 막고 수분이 저장되도록 하고 Top Soil 을 보존해 주었다. 후일 농토로 재개발하는 지역에서만 나무를 베어내면 남아있는 나무들이 마치 울타리처럼 강풍으로 부터 농토를 보호해주고 수분의 증발도 방지해 주었다. New Deal 정책으로 자칫 황폐해갈 뻔했던 중서부의 농토들이 다시 보존되고 회생하기 시작하였다.

막상 전기화로 생활이 편안해진 전국의 도시민들을 식량을 공급해주던 농촌의 농민들은 10% 정도만 전기를 쓰고 있었다. FDR 은 1935년 5월에 농촌의 전기보급을 위해서 Rural Electrification Administration 을 설립하고 사설 전기회사나 협동조합들이 발전과 배선을 하도록 융자를 해주었다. 1941년에 이르러서는 농촌인구의 80% 가 전기의 혜택을 받게되었는데 연방정부가 농민들을 배려하고 있다는 밝은 상징처럼 보이는 역사적인 사업이었다.


이 시점에서 New Deal 정책들의 성과 (업적) 을 잠간 중간평가해 보기로 하자.
미국이 사실상 “선전포고”는 없이 연합국들을 원조함으로써 실직적으로는 간접적으로 “참전”해 오다가 1941년 진주만 피습과 함께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하고 제2차 세계대전에 본격적으로 참전하였을 때까지는7년여의 New Deal 정책의 시행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수백 만 명의 실업자들이 있었고 나라가 전시체제로 돌입하면서 Keynes 이론을 대대적으로 국가재정에 적용하기 전까지는 본격적인 경기호황은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었다.

국가채무의 엄청난 증대에도 불구하고 정부의지출이 전시체제로 막대하게 늘어나자 경기호황이 윤활유를 잘 쳐준 치차들처럼 본격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FDR 의 “실험적”인 과감한 재정, 경제정책들은 국민들의 사기를 대공황이라는 수렁텅이 속에서 끌어 올렸고 사유재산제도를 존속시키고 자유기업제도를 벼랑에서 떨어지기 직전에 구출해냈다. FDR 은 “사회주의”의 유혹에 끌려 들어가지 않고 “중도주의”를 유지하면서도 은행, 농업, 동력자원 등에 대한 정부의 통제를 강화함으로써 나라의 경제를 연방정부가 주도할 수 있게 하였다.

드디어 연방정부가 노임수준과 근로시간 상한선등에 대한 기준을 세워 주었었고 농민, 노약자, 실업자들에 대한 최저한의 지원을 하게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미국의 헌법이 국가위기 중에서도 아무 손상이 없이 지켜질수 있는 것임을 재확인하게 되었고 국민간의 극심한 증오감이 없이, 내란도 없이 인권을 유린하지 않고도 평화시의 국난을 극복할수 있음을 경험하게 되었었고 “자유”는 독재가 아니라 자유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것임을 배우게 되었다.

이세상의 모든 좋은 일에도 반드시 끝장이 있게 마련이다. 아니 있어야만 한다. 인간들에게는 좋은 일이 연속되면 항상 더 좋은 일만 계속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본능이 있는것 같다. 흔히 “행복할수 있는” 모든 조건이 다 갖추어진 부잣집 외동아들은 늘 “불만”에 차있는 경우가 더 많다.

“개구리 올챙일적 기억을 못한다” 는 우리 옛말이 있는데 대공황중에 “등만 따시고 배만 부르면 더 원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던 미국사람들은 3, 4년후에 진짜로 등이 따시고 배가 불러지기 시작하자 옷도 더 좋은 것을 입고 싶은 욕심도 생기기 시작하고 한때 거의 “구세주”처럼도 보였던 FDR 이 “독재자”처럼 느껴지기 시작하였으며 New Deal 정책들의 집행을 위해서 쓸수밖에 없었던 강력한 통제와 규제들에 실증이 나기 시작하였었다.

거의 모든 분야와 계층의 사람들이 FDR 의 영향을 받았음으로 모든 사람들이 한두가지의 불평들을 가질수 있게 되었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을 포함해서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독재” 와 “유능” 은 같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것이어서 분리할 수 없는것 이라고 착각하는 수가 많다. 심지어 박정희시대를 “산업화시대” 라는 어설픈 용어를 써가면서 정당화 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만일 FDR 의 New Deal 정책들이나 제도개혁들이 사리사욕을 위한 것이었거나 그의 정권이 부패 했었다면 그는 아마 미국역사에 “독재자” 라고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정책들을 극렬하게 비판했던 사람들을 포함해서 FDR 을 독재자이었다고 평가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조태환/LI 거주>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