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166)제32대 대통령 Franklin Delano Roosevelt⑤

2017-07-21 (금) 조태환/LI 거주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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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한때 호황을 누렸던 공업부문도 대공황을 피해 갈 수 없었다. 거대 재벌들과
대기업들의 단속으로 국민들의 갈채를 받았던 Theodore Roosevelt 대통령 이후의 대통령들은 정책 시행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자유경쟁을 방해하는 독점기업, 기업간의 불공정한 협약 등을 단속해야 한다는 대원칙에는 동의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공황을 벗어나야 하는 미국의 경제는 재벌단속 보다는 기업회생이 더 긴급 하였다. FDR 은 정부정책의 중점도 바뀌어야 할 것임을 깨달았다. 공정한 거래를 파괴하지 않는 한도내에서 기존의 단속규제들이 완화되어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수백만명, 아니 천만명 넘는 실업자들이 길거리를 해메던 대공황은 민간 기업들만의
힘으로는 탈출할 수 없는것이 분명하여젔고 국민 모두가 정부가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한다고 기대하게 되었다. 다행히 미국은 불과 얼마 전인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온나라가 정부주도하에 일치단결하여 전쟁 중에 도리어 경제 boom 을 일으켰던 경험이 있었다.


물론 미국식 자본주의에는 생소한 경제계획, 생산과 유통과정에 대한 정부의 간섭, 통제, 배급등 다소 생활상의 제약도 병행된 것이기는 하였지만 미국은 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했던 것이었다. 평화시의 대공황도 정부주도하의 경제체제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제는 정부와 기업간의 관계가 “적대적”인 것이 아니고 대공황 탈출이라는 공동목표를 가진 “동업자적”인 관계가 되어야 할것임을 모두들 인식하게 되었다. FDR 은 전국의 상공회의소, 제조업자협회, 각종의 직능, 노동단체등의 제안을 참고로 하여 1933년 6월에 National Industrial Recovery Act 를 입법한후 NRA (National Recovery Administration) 를 신설하여 이법을 집행하게 하였다. NRA 는 각 산업별로 기업의 대표들과 노동자 대표들간의 협의로 산업별 “공정거래규약” (Codes of Fair Dealing) 을 작성 하도록하고 정부가 이런 규약들이 지켜 지도록 도와주었다.

이 규약들로 “물가와 노동임금의 하락을 방지하고 노동시간을 제한하고 최저임금을
보장 하였으며 어떤 물품들이 어느가격에 얼마나 생산될 수 있는 것인지 등을 규제하도록” 하였는데 NRA 가 생기기 전까지는 이런 “규약”들은 “독점행위”로서Antitrust 법들의 위반 이라고 정부의 제재를 받던 것들이었다.

NRA 가 생기면서 Antitrust 법들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정부는 말하였었다. 노동단체들의 협조를 얻기 위해 NRA 법에는 노동자들의 노조 가입권을 포함 시켰다. NRA 법이 철강, 방직등 대 기업들에서 시작해서 나중에는 Dog Food 생산업체들 까지 광범위하게 적용 되었다. NRA법은 효과적이기는 하였으나 모두가 자기들의 이해를 보호하기 위해 이 법을 이용 했다고도 하며 소기업들은 대기업들이 독점한다고, 대기업들은 비용이 너무 늘어나고 노동자들에게 너무 힘을 실어 주었다고, 노동자들은 노동자의 권리가 잘 보호되지 않는다고 불평도 했다.

6) 일자리 만들기 위한 대소규모 공공사업
FDR 은 실직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많은 국민들을 도와주고 구제 했어야 했었는데 한가지 방법은 장차 어느때이던지 건설해야할 공공시설을 미리 앞당겨서 건설하는 것이고 다른 방법은 당장 꼭 필요한것은 아닐찌라도 있으면 좋은 일들을 실직자들을 시켜서 일하게 하고 봉급을 주는 것이었다.

FDR 과 New Deal 정책의 기안자들은 곤경에 빠진 모든 국민들은 정부로부터 도움을 받을 권리가 있지만 일부 국민들이 사실상의 welfare 에 가까운 무상급여에 의존하는 습관이 생길 가능성도 우려 하였었다고 한다.

첫 번째 방법으로 PWA (Public Works Administration) 이 설립되어서 30억불의 예산으로 하수도, 학교, 우체국, 병원, 턴낼, 주택등과 항공모함 Yorktown 호와
Enterprise 호등을 건조하였었다. 착실하게 계획되고 큰 낭비없이 PWA 사업들은 집행 되었다.


한 가지 문제점은 PWA 사업들의 성격상 당장 곤경에 빠져있는 더 많은 사람들을 “구제” 할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람들의 긴급구제를 위해서 1933년 5월에 Federal Emergency Relief Act 가 입법되어 실직한 사람들에게 5억불을 무상지급해 주었다.

FDR 은 무상구제 보다는 별로 긴급하지 않은 일 일지라도 실직자들에게 일을 시키고 급료를 지불하기를 원하였다. 1933년 가을에 CWA (Civil Works Administration) 이 설립되어 그해 겨울까지 18만개의 사업에 4백만명의 실직자를 고용하여 4억불을 지불하며 도로, 공원, 어린이 놀이터, 비행장 등를 건설, 개보수하였다.

영세한 도시와 농촌의 교사들 봉급도 지불 되었다. 그러나 “무상구제”에 대한 여론도 좋지 않았었고 FDR 자신도 거의 10억불에 가까운 지출이 된것에 부담을 느껴서 1934년 봄에는 이런 사업들이 중단 되었다. 대부분의 기업가들은 New Deal 정책들이 미국의 자유경쟁적 자본주의를 말살 시켜가고 끝없는 혼동을 가져오고 있다고 비난 하였다.

FDR 취임후 15개월째인 1934년 6월까지 New Deal 정책들로 50여억불이 지출되었으며 1929년에 비교해서 국가채무는 두배로 증대 하였다. 그러나 FDR 은 국가의 예산이 균형이 되기 전에 “인간의 예산”이 먼저 균형 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경제생존을 위한 전쟁은 외침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 이라고 주장하였다. 또 New Deal 의 성과도 대단한 것이었다. 1934년말경 에는 200만명이취직을 하였었고 국가소득도 25%가 증대되었다.

1934년 11월의 중간선거 (국회의원들과 일부의 주지사만 뽑는) 때에도 미국의 실업자수는 1천1백만명에 이르렀 었지만 미국민들은 FDR 의 공적을 높이 평가 하였었다. 선거결과 FDR 의 민주당은 하원의석 75% 를 차지 하였으며 상원의석도 열자리가 늘어나 3분지 2 이상의 다수당이 되었었다. 민주당은 상하원과 대통령까지 차지한 정당이 되었으며 FDR 은 선거운동중에 국민들이 많이 희망적으로 고무되어 있음을 느꼈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제1차” New Deal 정책에 대해서 한가지 더 쓰고자 한다. 1935년 1월에 개원한 새국회는 FDR 의 요청에 따라 “마지막”의 대형 정부사업을 입법한다. WPA (Works Progress Administration) 가 50억원의 예산으로 신설되어서 건강한 실업자들을 고용했다. 일을 할수없는 사람들은 주와 시정부에서 구제하도록 하였다. WPA 는 최대한의 실업자 들을 고용하여 도로, 교량, 공공건물등을 짓게 하였는데 1943년에 WPA 가 중단되었을때 까지 110억불을 써서 850만명을 고용하였다.

WPA 산하에 National Youth Administration 을 두어서 16세에서 26세의 젊은이들을 고용하였는데 어떤 해에는 75만명의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에게 일자리를 주었었다. WPA 는 작가, 미술가, 음악가, 배우등도 고용하여 관광책자, 공공건물 장식, 연극제작, 음악공연등을 하게 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정부가 예술인들을 너무 도와주면 그들이 창의성을 잃게된다고 걱정하기도 하였다.

NRA는 FDR 이 대공황극복을 위해서 입법했던 New Deal 정책중의 하나로써 없어진지 오래된 법이다. 요즈음 미국사람들에게 NRA 가 무었이냐고 물으면 미국헌법 개정2항 에서 허가한 “국민의 총기 휴대권”을 수호하기 위해서 조직되었다는 National Rifle Association 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대공황 당시에 노동자들은 NRA 가 노동권을 충분히 보장해주지 않았다고 “National Run Around” 라고 비꼬았으며 흑인들은 NRA 도 흑인들 에게는 별로 도움을 준것이 없다고 “Negroes Ruined Again” 이라고 비난하기도 하였다.

<조태환/LI 거주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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