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 주는 많이 힘들었다. 내 개인적인 일 때문이 아니었다. 크게 애국심이 있는 인물도 아니고, 내 인생 가시권 밖에 존재하는 사회를 더 염려하는 사해동포주의적인 자가 아닌데도, 지난 한 주는 그러한 나마저도 세상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일들이 막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 사건들은 내 좋던 입맛을 떨어뜨렸고, 소화불량을 일으켰고, 심리적 불안감을 조성시켜 깊은 한숨을 반복적으로 쉬게 만들었으며, 그리고 내 두 다리에서 힘을 빼앗아갔다.
조국에서 들려오는 소식이 그 첫 시발점이었다. 그래도 설마, 설마 했는데, 아니 그 정도까지였을까. 일국의 대통령의 맘속에 어쩜 그토록 괴물 같은 ‘어른 아이’를 키우도록 그냥 놔뒀을까. 그래도 그 사람 정도면 눈 찔끔 감고 한 번 봐주지 뭐, 그 사람 정도면 대통령도 시린 자기의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었겠지, 이런 거였으면 이 정도까지의 좌절은 아니었을 것이다.
근데 이건 실소를 넘어 패닉 수준이다. 정신상태가 결코 정상적이지 못한(그가 한 말, 행동들을 볼 때) 한 중년여인에게 기라성 같은 정치인들과 한 나라의 수장까지 휘둘림 당한 것을 지켜보며 이 나라 백성들은 도대체 누굴 믿고 그들의 삶을 맡겨야 할까. 이게 곧 조국 발 비극적 사태가 내게 가져다준 고통이었다. 내 두 다리서 힘을 뺏어 간 또 다른 소식은 작금에 이 미국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다. 이곳도 하루가 멀다 하고 자고 일어나면 내 귀를 괴롭히는 나쁜 일들 천지다.
희망이 좀 보여야 하는데 이젠 그 불씨마저 보이지 않는다. 대통령 되기를 바라는 그 두 사람 중, 일단 한 사람의 입은 너무 거칠다. 거친 말은 거친 인격에서 오는데, 이는 우리 모두가 그에게서 일찍이 감지했던 바이다. 어떻게 그런 사람이 거대 정당에서 추천 받은 대통령 후보일 수 있을까. 하지만 그 우려는 현실로 드러나 버렸고, 그 현실은 우리에게 그칠 줄 모르는 삶의 통증을 유발하고 있다.
다른 한 사람은 당최 믿을 수가 없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그의 지난 행적들이 이게 단순한 느낌이 아닌 리얼한 현실임을 그대로 증명해준다.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 될 때, 우리의 몸과 삶을 부양해줄 이 미국의 미래는 어찌 될까, 사랑하는 자녀들이 정착하고 살아갈 이 땅엔 과연 소망이 보이는가, 그를 향한 이런 피할 수 없는 불신이 우리를 심히 염려케 한다.
그러나 여기서 더 힘든 건 뾰족한 해답이 안 보인다는 것이다. 과거 어려울 땐 그래도 출구 가 보였다. 미국 온 지 30년이 다 되어 가는데, 30년 전쯤만 해도 미국이 이러지는 않았다. 한국도 그땐 많이 나았다. 사회를 유지하는 어떤 모토 같은 것도 있었다. 정치가들 중 그래도 양심이 살아있는 자들이 꽤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나마 마지막으로 기대고 싶던 대통령에게서도(개인적으로 맘에 들든 안 들든), 그가 무슨 말을 하면 일단 불신부터 생기고, 급기야 그 불신 내용이 현실로 드러나 버리는 이 상황에서 백성들은 어디에 의지하며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끝없는 불신은 결국 공동체의 갈 길에 해답을 제거해버리는 치명적인 원인이 됨을 새삼 깨닫는다.
이처럼 불신이 사회적 좌절을 잉태하는 근원적인 악이라면, 그럼 그 악이 주는 고통을 경험하지 않을 유일한 곳은 어디일까? 교회이어야 한다고 확신한다. 교회는 신뢰가 살아 있는 곳이어야 한다. 교회에서 신뢰가 깨지면 그 교회 공동체는 와해된다. 정치 지도자에게서 느껴지는 불신이 교회 지도자들에게서도 똑같이 느껴진다면 그땐 사회도 교회도 끝이다. 교회 지도자의 생명은 그에게서 영적 진정성이 공감될 때 유지된다. 그 공감대가 하락하면 생명 없는 지도자로 전락된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교회가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를 가장 닮았다고 믿으며, 매주 우리의 발걸음을 교회로 옮기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그래도 교회에 예수께서 보여주신 신뢰의 확실한 모범이 실존한다고 믿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도 교회가 세상 나라에 창궐하는 악의 실체들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라는 ‘희망의 끈’을 놓고 싶지 않아서가 아닐까? 교회는 우리의 넓적다리의 힘을 뺏어가는 위험의 시대 속에서 유일한 희망이 되어 주어야 한다. 그 희망의 메시지는 교회가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신뢰를 회복할 때 맛볼 수 있다. 아픈 시대에 희망을 던져주기 위해 신뢰를 회복하는 교회가 되도록 하자. 신뢰, 이 불신의 세태 속에서 지금의 교회들이 추구해야 할 키워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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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숭 목사/ 새크라멘토 크로스포인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