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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인 칼럼] 실언(失言)과 실언(實言)의 차이

2016-08-31 (수) 김 숭 목사/ 새크라멘토 크로스포인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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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두 달이 가까워온다. 한국의 한 고위 관리가 신문사 기자와 인터뷰 도중 “민중은 개돼지와 같다”라는 말이 온 세상에 퍼진 지. 참으로 흉측한 이 말은 사회의 음험함을 총체적으로 잘 담아낸 한 한국영화에 등장하는 대사 중 하나다.

아무리 인용을 통한 유통이 자유화된 세상이라지만, 그 관리는 하면 안 될 말을 안 해도 될 인용과 함께 자신의 입 밖으로 쉽게 내던져버렸다. 그 결과는? 수습이 불가능할 정도의 일파만파 식 유통이 삽시간에 이뤄짐으로써 그의 그 설화(舌禍)는 결국 자신의 목을 자르고 말았다.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잘 잊어버리는 게 한국인들의 특성임을 알면서도 이 불편한 추억을 다시 끄집어내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실언(失言)’과 ‘실언(實言)’ 사이의 애매함을 한 번 분간해보고 싶어서다. 물론 후자의 ‘實言’은 사전에도 없는 나의 조어(造語)이다. 진짜 속말이랄까? 즉 열매 있는 말, 그래서 내 마음의 씨앗에 담긴 DNA가 그대로 열매를 맺는 ‘참말’을 뜻한다. 그렇다면, 관리의 그 말은 사태가 예상치 않게 크게 불거져버린 시점에서 눈물까지 보이며 참회용으로 썼던 표현처럼 정말 ‘失言’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의 원래의 마음을 그대로 드러낸 ‘實言’이었을까? 자못 궁금하다.


이럴 땐 대개 그 궁금증을 더 불타오르게 하는 불쏘시개 같은 게 있다. 바로 ‘취중(醉中) 정황’이다. 정치 세계에서 종종 있는 취중 발언, 그건 과연 취중 ‘진담’인가, 아니면 글자 그대로 그저 술에 취해 한 헛소리에 불과하는 건가? 한국 드라마를 보면 술자리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드라마 속 술좌석의 절반 정도는 맨정신으로는 하지 못할 진심을 상대에게 전달하는 자리로 애용된다. 이를테면, 사랑 고백을 잘 못하던 연인이 상대에게 사랑을 고백할 때, 평소 닦달거리는 상사에게 부하직원이 자신의 불편한 심기를 전달할 때, 엄한 아버지께 자식의 평소 속마음을 말하고 싶을 때, 같은 것들이다.

그런데 이게 정말 그럴싸한 게, 우리 역시 진짜로 중요한 말을 할 땐 맨정신으로는 잘 못하기 때문이다. 목회할 때도 그렇다. 내가 참 힘들어하는 것 중에 하나는 교인들과 심각한 이야기를 해야 할 때 밥을 같이 먹는 일이다. 대화의 주제 자체가 이미 소화불량에 걸리기에 딱 알맞다. 그런데 그런 얘길 밥 먹으면서 한다? 정말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그들처럼 술좌석을 만들 수는 없고… 아무튼 이래저래 목회는 힘든 일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 관리의 취중 失言은 失言이 아닌 實言이었을 거라고 확신한다. 그러니까, 그의 ‘취중(醉中)실언(失言)’은 ‘취중(醉中)실언(實言)’이었던 셈이다. 그의 그 말은 비록 그게 취중이었다 할지라도, 그의 본심을 그대로 드러낸 말이었을 공산이 크다.

아마 취중이 아니었으면 그는 원래 자신의 생각을 그런 식으로 표현하지 않았을 것이다. 취중이었기에 오히려 그렇게 직설적으로 자기 마음의 민낯을 더 쉽게 드러냈던 것이다. 여기서 자연스레 떠오르는 건 미 대통령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의 막말이다. 그는 공식석상에서 수많은 실언(失言)을 해왔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失言이 아니다. 물론 후에 그 말들이 말썽을 일으키면 그게 잠깐의 실수였다고 사과한다(이게 너무 자주 반복된다!). 그러나 그게 진심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건 그 失言들이 그의 본심이 그대로 담긴 實言들이기 때문이다.

말은 정말 중요하다. 그 사람의 말은 그의 인격의 얼굴이다. 이 피할 수 없는 진리 때문에라도 우리는 나의 말에 대해 더 신경 써야 한다. 말하고 싶은 대로 다 내 뱉어놓고는, 그게 내 본심은 아니었다, 난 뒤끝 없다, 이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상대는 이미 그 상처 안에서 허덕이고 있는데, 난 지금 다 잊었으니 이해해 달라, 이것은 마치 그 상처에다 소금을 뿌리는 것과 같다.

그가 원래 그런 사람이어서 그런 말을 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말을 항상 정치적으로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면 그는 정치적이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어떤 사람인가가 더 중요하다.

그리스도는 겸손하신 분이셔서 겸손한 말을 하셨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우리를 향한 그분의 말 걸기에는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게 넘쳐난다. 신앙의 성숙은 내면의 성숙에서 온다. 내면이 성숙하면 말도 같이 성숙해진다. 失言을 줄이고 싶은가? 좋은 實言을 더 생산하고 싶은가? 그러려면 나의 내면의 변화에 더 치중해야 할 것이다. 이젠 취중이라고 해서 용서되는 시대는 다 지나갔음을 기억하면서.

<김 숭 목사/ 새크라멘토 크로스포인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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