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당신의 안녕을 ‘맞춤’하라

2016-06-03 (금) 김홍기 패션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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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홍기 패션큐레이터의 “입는다 고로 존재한다”

맞춤은 인간의 안녕을 모색하는 행위다. 안녕은 두 개의 차원으로 나눠진다. 안락함과 자존감이다.

안락함이란 인간이 입고 먹고 사용하는 사물과의 관계가 얼마나 건강한가를 뜻한다. 옷을 예로 들면 옷과 인간 사이에 얼마나 여백을 만들어내는가가 옷의 아름다움과 옷을 입고 활동하는 인간의 자유를 만들어 낸다. 자존감이란 소비자의 내면을 읽고 그 감성을 제품 생산과정에 덧입힐 때 촉발되는 감정이다. 이 안락함과 자존감을 만드는 것은 인간의 손이다.

런던의 중심가 리전트 스트리트의 ‘새빌로’엔 수제 맞춤 양복점들이 즐비하다. 이곳에서 만들어지는 양복을 비스포크 수트라고 한다. 비스포크는 미리 만든 패턴을 이용하지 않고 고객의 치수를 직접 재고 몸을 따라 재단하는 수트다.


입는 사람의 마음과 몸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비스포크 수트 제작과정은 절반은 예술이고 절반은 과학이다. 목에 건 줄자로 치수를 측정하고 어깨와 팔, 허리와 엉덩이의 곡선을 꼼꼼히 살피며 반복된 치수 재기와 가봉, 보정을 거듭한다. 테일러들은 짧게는 4개월에서 길게는 1년 동안 수십 차례 가봉과 보정 과정을 거쳐 최적의 맞음새를 찾기 위해 고객과 끊임없이 대화한다.

새빌로의 저명한 가게들은 50년에 걸친 고객에 대한 사소한 정보와 대화 내용까지도 수기로 기록한 원장을 간직하고 있다. 보통 이곳에선 재단사와 고객 사이에 오랜 대화적 관계가 만들어진다. 한 벌의 양복을 맞추기 위해 나누는 대화의 몫, 대화의 분위기, 그 속에서 상호신뢰는 테일러의 손을 통해 고스란히 옷에 덧입혀진다. 고객의 대화가 어떤 내용을 담는지, 그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이러한 내용이 반영된다.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발생한 이후, 유럽 각국은 오늘날 저가공세를 펼치는 중국산 제품처럼, 자국 시장에 범람하는 영국산 제품과 피나는 경쟁을 벌여야 했다. 당시 디자이너이자 이론가였던 윌리엄 모리스는 예술공예운동을 통해 중세시대의 장인들이물품을 제조하던 방식과 미학을 고집했다.

장인의식과 손의 노동을 통해 만들어진 물품이 산업혁명 후 쏟아지던 기계화 초기의 조잡한 물품들로 부터 훼손된 인간 정신을 고양할 수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 정신은 오늘날 명품 및 맞춤 제품의 기본적 철학을 이룬다. 인간의 불완전함이 반영된 물품이 기계로 생산된 제품보다 더 비싼 시장 가치를 얻게 되는 모순은 어디에 있을까? 세계적인 미술사가 앙리 포시용은 ‘손을 예찬함’에서‘ 손은 삶의 가장 고등한 형태처럼 독창적이며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손은 구체적 현실을 창조하는 전초기지다. 최근 한국사회에 다양한 물품제작을 위한 공방이 등장하는 건 이런 기류와 맞물려있다. 손은 기계처럼 정교할 수는 없지만, 손과 도구가 우정을 쌓으며 생각을 끊임없이 교정하는 행위 자체가 인간의 모든조형행위를 뒷받침한다. 손은 실수를 범하지만, 도구를 지속적으로 사용하고 쓰면서 새로운 자신의 생각을 결합할 환경을 창조한다.

손은 인간의 노동을 끊임없이 구상하고 실험하게끔 격려하는 도약대다. 영어의 ‘ Hold’‘ Grasp’ 같은 단어에는 물리적으로 어떤 사물을 쥐고 만지는 행위를 넘어 ‘상황을 인식하고 이해하다’라는 뜻이 녹아있다. 그만큼 손에는 인간을 둘러싼 환경을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어떤 것을 만들어가는 제작행위가 포함된다.

며칠 전 지인의 보석 가게에 들렀다가 멋진 이야기를 들었다. 여든의 시어머니가 갓 결혼해 들어온 며느리를 위해 자신의 시어머니에게서 받았던 자수정 반지를 새로 만들어 달라고 맡긴 것. 반지는 몇 가지 보석을 추가해 세팅하고 기존 자수정도 모던한 디자인으로 새롭게 커팅을 했다.

맞춤이 소중한 것은 반지의 의미가 며느리를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인다는 시어머니의 애정이며 자신이 살아온 역사의 흔적을 사물을 통해 남겨주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 속에 남는 기억은 또 다른 인간의 손과 맞춤에 담긴 배려를 통해서만 디자인된다. 맞춤이 곧 인간의 조건인 이유다.

<김홍기 패션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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