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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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98)미국의 산업화 시대 (1865-1900)①

2016-04-01 (금) 조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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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전쟁이 끝난 1865년부터 1900년에 이르는 30여 년간은 미국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고 경제는 공산업화, 사회는 도시화가 되어갔고, 전신.전화가 보급되고 그때까지 교통의 중추가 되어왔던 운하와 교량, 구식도로 위에 전국에 철도가 건설됨으로써 미국이 세계의 열강으로 약진할 수 있는 준비가 다된 시절이었다.

이미 미국은 서유럽 전체보다 더 넓은 땅덩어리에 더 다양한 문화들이 도입되고 있었다. 새 이민자들은 본국과 비슷한 기후를 따라 영국인들은 뉴잉글랜드로, 스웨덴 사람들은 미네소타의 눈이 많이 오는 평야로, 이탈리아 사람들은 항상 햇볓이 쨍쨍 내리쬐는 캘리포니아로 와서 과수원과 포도를 재배하였다.

시카고에서 뉴욕까지의 거리는 실로 런던에서 로마까지 갈 정도로 먼 거리였지만, 비교적 잘 발달된 미국의 교통과 통신시설은 이 큰 땅덩어리가 한 나라, 한 경제로서 발전해 나가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1900년이 되기 전에 동부에는 이미 보스턴, 뉴욕, 필라델피아 등의 대도시가 있었고 중서부쪽으로는 시카고, 세인트 루이스, 덴버, 샌프란시스코 등의 대도시가 번창하고 있었지만 , 인구가 지나치게 붐비지는 않았으며 세계 각국에서 개발된 기술들과 물자들이 미국으로 도입되었고, 한 건물 안에서 수천 명이 동시에 일하고 사는 마천루들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미국에 생기기 시작하였다. 그때까지 인류역사에 없었던 여러 가지 일들이 계속 새롭게 엄청난 규모로 생겨나는 나라로서 정치, 경제, 사회제도의 한계와 능력을 시험해 보는 Test Tube 가 되고도 있었다.

지난 몇 년간 한국에서는 경제학자들도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창조경제”라는 조금 애매한 개념이 국가경제 성장의 기초가 되는 것으로 생각해 오는 것 같다. 미국에서는 1900년까지 이르는 30여 년 동안에 국가주도형이 아닌 “미국식 자본주의 경제를 창조”한 기라성같은 산업 캡틴 들이 혜성처럼 등장해서 미국을 세계 최첨단의 도시국가, 산업국가, 부유국가로 만든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자본주의의 전형적인 폐해도 많이 남긴다. 동시에 잘못되어 가고 있던 제도를 개혁하려는 사회운동도 시작되었고, 노동자운동도 성공하여 부의 지나친 불공평한 분배를 부분적이나마 방지한다.

천행스럽게도 공권력으로 자본의 횡포와 위력을 막은 훌륭한 대통령들이 등장한다. 만일 시대에 적합한 국민들의 자정노력과 앞을 내다봤던 정치지도자들의 용기가 없었다면 미국은 Karl Marx가 예언했던 대로 세계에서 제일 먼저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직접적인 동기는 달랐을지라도 미국에 이민온 사람들은 모두가 다 큰 야망을 가지고 온 사람들이다. 미국은 ‘기회의 나라’라고도 불린다. 위의 두 가지 분자가 섞이면 “무슨 일이되었던 간에 남보다 한발 앞장서서 우선 저질러 놓고 본다”는 미국의 특산인 “Go- Getter” 라는 인종이 생겨난다. 이 Go-Getter 들의 극성스러운 활동으로 미국의 경제가 활성화 되고 그들이 성공해가는 과정에서 부산물로 미국민 전체의 생활수준도 높아진다. 미국은 정치적 민주화에다가 그들의 노력으로 물질적 민주화까지 이룰 수 있었다.

앞으로 몇 회에 걸쳐서 근대국가로 변모해가던 이때의 미국의 경제를 주름잡았던 몇 사람들의 얘기들을 간략하게 써보고자 한다. 우선 철도회사들과 대기업들, Andrew Carnegie, J.P. Morgan, John D. Rockefeller, Thomas Edison, Henry Ford, Montgomery Ward, Sears & Roebuck, 백화점 등에 대해서 써보고자 한다.

철도망의 전국적인 대통은 대폭적인 시장확대를 유발하였고 기업들의 종류와 규모가 커지도록 하였다. 기회의 시기이기도 하였지만 위험하고 모험스러운 때이기도 하였다. 석유, 철강, 철도사업등은 점점 경쟁이 심해져 가고 있었다. 1873년부터 1897년에 이르는 기간중 13년간은 심한 경기불항의 시기이었다.

John D. Rockefeller 는 그 불경기시절을 회상하면서 “내가 몇 달 몇 년간 낮에는 뛰고 밤에는 걱정하느라 잠을 못잤던 시절을 어떻게 해서 넘겼던지 다 기억할 수가 없다. 만일 그때에 앞으로 닥쳐올 어려움을 미리 알았더라면 아마 일찍이 두 손을 들었을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한다. 그는 그 어려웠던 시기를 정당하게 때로는 부당한 모든 방법을 총동원해서 뚫고 나와 미국 최고의 억만장자가 되었다.


그의 지나친 부당경쟁은 극심하게 사회적 지탄을 받게되어 결국 그는 6개월이나 법망을 피해다니던 끝에 심문을 받기 위해 법정에 서게 되었는데. 경쟁자들을 말살시키기 위해 그가 동원했던 방법들에 대한 힐문을 받자 “35년 전에 있었던 일들이라 기억하지 못하겠다.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직장을 주었고 미국의 경제를 키운 사람이다.

내가 오늘 왜 이 법정에 서야되는지 알 수가 없다. 당신들은 내가 ‘독점’을 했다고 규탄하고 있지만 나는 ‘기업을 운영’ 한 것 뿐이다” 라고 항변하였다. 초기 미국의 자본주의 가 노동자 착취위에 기업=독점=치부 라는 공식이 공공연하게 적용되었음을 잘 보여준 일화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철도
철도는 미국경제의 동맥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농부들은 농산물을 기차로 도시에 내다 팔아야 했고 기차로 가져온 도시의 공산품들을 사서 써야했다. 도시의 공장들이 돌아가기 위해서는 오지에 있는 광산물 등 원자재들과 석탄을 기차로 실어와야 했었다.

1828년부터 건설되기 시작했던 미국의 철도는1869년에는 최초의 대륙횡단 철도가 완공될 정도로 성장해가기 시작하였다. 철도의 대륙횡단으로 미국동서 양단 간의 여행시간은 한달에서 한 주일로 줄어 들었고, 철도망은 미국 전국의 오지 까지 퍼져 나갔다.

산업활동이 활발해졌던 1880년대에 건설된 철도가 1828년 부터 1879년 까지에 건설된 철도보다 더 많았으며 첫 대륙횡단 철도가 건설된 후 25년 안에 네 개의 대륙횡단 철도가 추가로 건설되었다. 1900년에 이르러서는 미국철로의 총길이는 전 유럽과 러시아를 합한 철로의 길이보다 더 길었다.

철로 건설의 촉진을 위해서 연방정부는 1억3천1백만 에이커를, 주정부들은 4천9백만 에이커의 땅을 철도회사들에게 무상으로 주었다. 한 철도회사만 제외하고 나머지의 대륙횡단 철도는 정부들이 내어 준 땅들에 철로를 건설했다.

일단 황무지에 철로를 건설하고 나면 철로주변의 땅들은 ‘교통이 편리한 옥토’가 되어서 철도회사들이 비싸게 새 이주자들에게 팔 수 있었다. 농부들은 철도회사들의 단골손님들이 되었고, 철도회사들은 이들의 화물수송에 의지하는 공생관계가 수립되었다.

아일랜드에서 온 새 이민자들이 운하공사에 이어 철로건설에 많이 투입되었고 중국에서 데려온 노동자들이 대거 투입되었으나 이들은 많은 천대를 받았고 이들에게는 끝까지 미국시민권이 주어지지 않었다. 미국에 증기기관선이 도입되고 미국산 증기기관이 많이 쓰이기 시작하면서 증기기관이 폭발하는 등의 사고가 잦았는데 철도에도 무모하고 위험한 일들이 많았다고 한다.

미국의 초고속적인 철도 발전속도에 놀란 유럽의 철도전문가들은 미국철도를 시찰 왔다가 기절초풍을 하였다고 한다. 마구잡이 식의 철도건설이 안전은 완전히 무시한 것과 같았던 것을 본 것이었다.

계획된 철도 앞에 높은 산이 있으면 터널을 뚫거나 아니면 완만한 경사로 산을 돌면서 철로가 놓여져야 하는 것인데, 미국의 철로들은 그저 거의 직선으로 산꼭대기까지 올라갔다가 산꼭대기에서는 마치 롤러코스터가 내려오듯 직선으로 내려오도록 만들어 놓은 곳도 많았고, 산꼭대기에 눈과 얼음이 쌓여 있으면 얼음 위에 그냥 철도를 놓아버리는 등의 무모하게 건설된 철도들도 있었다. 열차의 탈선, 전복 등의 사고가 아주 많았고 운행 중 눈이 많이 쌓여 열차가 며칠씩 움직이지 못하는 사고도 있었다고 한다.

<조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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