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묵정밭 지나면 논둑길… 오르락 내리락 지루할 틈이 없네

2015-11-27 (금) 여주 - 최흥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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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강 여주 구간 ‘여강길’ 트레킹- 여강 한 구비 돌아 산은 마치 그림 같은데 (驪江一曲山如畵, 여강일곡산여화)

▶ 반은 색칠을 한 듯하고 또 절반은 시 같구나 (半似丹靑半似詩, 반사단청반사시)

묵정밭 지나면 논둑길… 오르락 내리락 지루할 틈이 없네

강천섬은 넓은 잔디광장과 은행나무 산책길이 일품이다.

고려말기 문장가 목은 이색이 지은 여강미회(여강에서 생각에 젖다)의 한 대목이다. 여강의 풍경이 시 같고 그림 같다 읊었으니, 어느 게 실제고 어느 것이 복제인지 헷갈릴 정도다.‘ 여강’은 경기 여주구간을 흐르는남한강의 애칭이다. 가을이 짙어가는10월 끝자락, 여주 남한강 주변 마을을 연결한 여강길을 걸었다.

영동고속도로 인천방향 여주IC를조금 앞두고 남한강교를 건널 때 오른편으로 나지막한 마을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여강길 4개 코스 중에서도 경치가 가장 빼어난 길이 바로이 얕은 언덕에 숨어있다.

제1코스 부라우나루터~우만리나루터 구간(2.7km)이다. 시작지점을 찾기 쉽지 않다. 여주읍내에서 점동면으로 이어지는 345번 지방도에서 왼편 단현1리 마을회관까지 가면 여강길 안내 표지판을 만난다. 여주시청기준 약 5km 지점이다. 이곳에서 강변방향으로 들어서면 그제야 본격적인 걷기길이다.


바닥에 그려진 화살표를 따라 두주택 사이 골목길을 통과하면 바로남한강이 펼쳐진다. 오른편 아래 커다란 느티나무 몇 그루가 버티고선자리가 바로 부라우나루터. 얼핏 외래어처럼 들리지만 나루터 부근의 바위가 붉다는 데서 유래한 지명이다.

‘붉은바위-붉바위-부라우’로 발음하기 쉽게 변화했다는 설명이다.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만큼 붉은색은 아니지만 발아래 강물이 흐르는 전망좋은 바위엔 ‘단암’이라 새긴 글자가선명하다.

단암은 숙종의 2번째 부인인 인현황후의 작은오빠 민진원의 호이기도하다. 바위 위에 침석정이라는 정자를 세우고 내려다 보이는 한강 물길을 단강이라고 불렀다는 여흥 민씨의 위세만큼 풍광도 빼어난 곳이다.

바위 위편 언덕배기에는 커다란느티나무 대여섯 그루가 넓게 쉼터를 만들어 소풍 온 듯 쉬어가기 알맞다. 이곳부터 상류 우만리나루터까지2.7km 구간은 남한강과 붙었다 떨어지길 반복하며 얕은 언덕을 오르내린다. 소나무와 참나무가 뒤섞인 푹신한산길은 묵정밭을 지나기도 하고 더러는 비좁은 논둑도 건너 지겹지 않다.

우만리나루터에는 부라우나루터느티나무보다 우람한 수령 300년의느티나무 한 그루가 떡 버티고 섰다.

가슴둘레 높이가 6.8m라니 장정 네댓은 팔을 벌려야 겨우 두를 수 있을 만큼 당당하다.

주변에 경쟁을 할 다른 나무가 없어 마음껏 가지를 뻗고 잎도 풍성해한눈에 봐도 잘 생겼다. 지금은 가끔씩 모터보트가 지날 뿐이지만, 나루터마다 자리잡은 키 큰 느티나무는 배를 기다리는 주민들의 쉼터인 동시에사공들에게는 이정표였다.


손녀를 데리고 강바람을 쐬러 나온 우만리 주민 윤정식(64)씨는 나룻배를 타고 강 건너 마을 뒷산까지 나무를 하러 다니던 20대 시절을 기억하고 있었다. 작은 배는 10여명 내외,큰 배에는 30~40명까지 타고 차량까지 실었다니 흔히들 상상하는 조그만 쪽배는 아니었나 보다. 나무꾼들은 아침에 나가면 오후 2~3시는 돼야 돌아오지만 나룻배는 쉴새 없이두 마을을 오갔기 때문에 주민들에겐 없어서는 안 될 교통수단이었다.

이따금씩 강원도에서 통나무를 엮어서울로 목재를 이동하는 대형 뗏목도지나고, 소금배도 들어왔다고 한다.

여강길은 영동고속도로 남한강교아래를 지나 흔암리나루터와 아홉사리과거길을 거쳐 충주 앙성면에 살짝발을 들여 놓았다가 원주 부론면 흥원창으로 연결된다. 조선시대 세곡창고가 있었던 흥원창은 강원 횡성군태기산에서 발원한 섬강이 남한강과만나는 곳이다. 여강길은 한강 자전거 도로와 나란히 섬강교를 건너 다시 여주 땅으로 돌아와 바위늪구비에서 지친 발걸음을 쉬어간다.

주민들이‘ 바나깨비’라 부르는‘ 바위늪구비’는 강천면 굴암리 앞 늪지대와 연결된 모래톱(섬)일대를 일컫는 지명이었다. 늪의 깊이가 명주실한 타래를 풀어야 될 만큼 깊어 이무기가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곳이다. 늪의 끝자락 커다란 바위는 돌로치면 퉁퉁 소리가 날만큼 속이 비어있는데 바로 이무기의 집이라는 이야기가 제법 그럴듯하다.

바위늪구비라는 이름은 사실 4대강 공사 때문에 널리 알려졌다. 이곳에서 멸종위기종인 단양쑥부쟁이가발견되면서 지역 환경단체에 의해 상징적 식물로 부각됐기 때문이다. 충주댐 공사로 단양의 자생지가 수몰되면서 멸종된 줄 알았던 단양쑥부쟁이가 이곳에서 발견된 건 공사 초기인 2009년이었다.

4대강 공사 후 늪에는 샛강이 만들어지고 늪과 연결된 모래톱은 ‘강천섬’ 유원지로 탈바꿈했다. 공사 전강천섬은 홍수 때만 섬으로 변하고평상시에는 마을과 연결돼 있었다. 특히 물 빠짐이 좋아 주민들이 땅콩농사를 많이 지었는데, 강이 범람해 농사를 망친 이듬해는 수확량이 2배로늘어날 만큼 주민들에겐 보배 같은존재였다.

환경단체의 문제제기로 강천섬엔다행히 4곳에 단양쑥부쟁이 서식지를 조성했고, 지금은 안정적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2개의 작은 콘크리트다리로 연결된 섬에는 지금 하얀 억새와 노란 은행나무 물결이 한창이다.

드넓은 잔디광장 한 켠으로 줄지어선은행나무가 터널을 이뤄 여행객들에게 가을 정취를 듬뿍 전하고 있다.

“공사가 시작된 후 매일같이 강이파괴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앓아 누울 정도로 정신적 트라우마가 컸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 입장에선 그 강에서 또 희망을 찾을 수밖에 없었죠. 나쁜 것 중에서도좋은 것을 찾아내야 살아갈 수 있잖아요? 다행히 지역주민들이 여강길을꾸준히 찾아줘 지금은 많이 치유된상태입니다.” 길 안내와 운영을 맡고있는 비영리민간단체‘ 여강길’ 의 박희진 사무국장이 전하는 여강 이야기엔깊은 상처를 보듬고 힘겹게 치유의 길로 들어선 남한강의 아픔이 짙게 배어 있었다.
묵정밭 지나면 논둑길… 오르락 내리락 지루할 틈이 없네

당당한 풍모를 자랑하는 우만리나루터 느티나무.


▶ 여행메모

▦매월 둘째 토요일, 넷째 일요일에여강길 걷기 대회가 열린다. 자세한 시간과 구간은 여강길 홈페이지(www.rivertrail.net)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여강길 상류에서 여주로 되돌아오는 흥원창~섬강교~강천섬~강천보구간 일부는 한강 자전거길과 겹쳐 있어 자전거로 접근하기 용이하다.

▦제17회 여주오곡나루축제가 10월 30일~11월1일 신륵사관광지 일원에서 열린다. 오곡장터 주막장터 등먹거리와 마당극 마임 마술 등 9개테마로 구성된 즐길거리가 풍성하다.

▦강천섬 초입 강천매운탕(031-882-5191)은 지역에서 소문난 맛집이다. 쏘가리와 잡고기 매운탕을 잘한다.

choissoo@hankookilbo.com

<여주 - 최흥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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