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소중한 사람 잃었지만 당신을 용서합니다”

2015-10-21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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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 문 여전히 활짝 성경공부도 평소처럼

▶ 유족 화해 메시지 불구 내면의 상처는 그대로

“소중한 사람 잃었지만 당신을 용서합니다”

임마누엘 아프리칸감리교회에서 거행된 합동 장례 예배에서 교인들이 손을 잡고 기도하고 있다.

■‘인종증오’ 총기난사로 9명 희생 임마누엘 아프리칸 감리교회 탐방

용서가 쉬운 건 아니다. 더구나 가족을 죽인 범인을 품에 안는다는 게 가능할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세상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 절대적인 힘에 의지할 때 사람과 인생은 상상할 수 없는 수준으로 성숙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NYT)는 지난 18일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찰스톤 시에 위치한 임마누엘 아프리칸 감리교회 탐방 기사를 크게 실었다. 기사의 제목은 ‘9명이 살해된 찰스톤 교회의 열린 문과 여전한 아픔’이었다.

지난 6월 백인 우월주의자 청년이 이 교회의 성경공부 시간에 총을 난사해 목사를 포함해 9명이 숨졌다. 1791년 세워진 남부 지역의 유서 깊은 흑인 교회인 임마누엘 아프리칸감리교회는 그날 현대 미국 역사상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인종 증오 학살 사건의 현장이 돼 버렸다.



수요일 저녁 성경공부가 열린 교회를 찾은 뉴욕타임스 기자는 노어벨 고프 목사를 조명하며 기사를 시작했다. 고프 목사는 총격 사건이 벌어진 바로 그 장소에서 성경공부를 인도하고 있었다. 교회 입구에 금속탐지기는 설치돼지 않았지만 경찰관 한 명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순식간에 아홉 명의 생명을 앗아간 살인 사건이 발생한 지 4개월이 지났지만 모든 상황이 종료된 건 아닌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처음 보는 사람을 포함해 모든 이가 환영을 받았다. 지난 6월 총을 난사한 딜런 루프가 범행 직전 따뜻한 환대를 받았던 장면과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겉 모습이 아무리 평온해 보여도 학살이 벌어지기 이전과 모든 게 똑 같을 수는 없다.

고프 목사는 인간은 모두 죄인이라고 말하면서 “나라고 아니겠냐”며 “성경에 큰 죄와 작은 죄 사이에 차이가 있더냐”고 기자에게 물었다.

시간이 흐르고 교인들은 평소와 다름 없이 예배와 성경공부에 참석하고 기도를 드린다. 550명의 성도 가운데 많은 이는 교회가 용서의 모범이 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안도와 함께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유가족들은 이미 사건 직후 범인을 향해 용서의 메시지를 전한 바 있다. 성경공부에 참석했다가 숨진 에델 랜스 할머니의 딸은 “가장 소중한 사람을 빼앗아 갔고 이제는 어머니와 말도 나눌 수 없게 됐지만, 당신을 용서한다”고 밝혀 세계적인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또 다른 희생자인 미라 톰슨의 가족도 “우리는 당신을 용서한다. 그러나 이번 일을 회개의 기회로 삼아 죄를 고백하고 가장 귀한 분인 예수님께 삶을 드리길 바란다”고 화해의 손길을 건네며 “과거가 어떠했든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을 변화시키실 것”이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성경공부가 진행 중인 홀에는 아직도 총격 사건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수사관들이 총탄과 구멍난 부분을 증거물로 수거해 갔지만 벽에 난 총알 자국은 여전하다.

교인들은 여전히 슬픔과 고통 속에서 내면의 투쟁을 벌이고 있다. 75세의 윌리 글리 옹은 뉴욕타임스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천국에 가기 위해 범인을 용서해야 한다면, 차라리 범인과 함께 지옥에 가겠다.”하지만 임마누엘 교회의 용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확산시키고 있다. 이날 모임에는 멀리 신시내티에서 달려 온 백인 크리스천 그룹도 있었다. 이들 가운데 질리 워노는 “존경심과 지지를 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변화가 필요하다”고 방문 동기를 전했다.

<유정원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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