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 무속신앙 총본산 송당리 금백조 본향당
▶ 영화 ‘이재수의 난’ 촬영지·마을에 모두 18개 오름
제주는 신화의 섬이다. 설문대할망을 비롯 영등할망, 삼승할망 등 많은 설화들이 전해져 내려온다. 바다 한가운데서 치솟은 한라산의 웅장한 산세와 집채만한 파도를 일으키는 거대한 바다를 끼고 있는 제주의 대자연이 빚어낸 이야기일 것이다.
제주의 마을 저마다엔 신당이 있고, 그 신당마다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들은 그리스 신화만큼이나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
제주 무속신앙의 총본산으로 여겨지는 당이 있다. 제주시 구좌읍 송당리의 금백조 본향당이다. 금백조는 강남 천자국에서 표류해 제주로 들어와 사냥꾼 소천국과 결혼해 농경문화를 전수한 농경의 여신이자, 가정 안녕의 수호신이다. 이 당에서 아들애기 열여덟, 딸애기 스물여덟이 퍼져나갔다고 하니 제주 신당의 기원이라 할 수 있다.
신들의 고향인 송당리는 오름의 마을이기도 하다. 영화 ‘이재수의 난’촬영지인 아부오름을 비롯해 이 마을에는 모두 18개의 오름이 있다. 제주의 마을 중 가장 많은 오름을 끼고있는 곳이다.
마을의 산재한 오름과 들녘의 초지에서 오래 전부터 마소를 키워왔다.
조선시대 말을 키우는 관영목장의 일소장이 위치했던 송당 마을엔 이승만 정권 당시 첫 국립목장으로 지정된 송당목장이 자리하고 있다.
이 마을에 최근 소원을 빌며 제주의 청정 자연을 거니는 명품 트레일이 생겼다. 오름과 신당을 끼고 있는 마을의 독특한 자연과 역사를 함께 체험할 수 있는 ‘소원 비는 마을 송당 트레일’이다. 트레일의 출발점은 송당리사무소다. 바로 옆 물길을 따라 1㎞ 가량 걷다 보면 당오름 옆 체육공원에 다다른다.
이제부터는 숲길이다. 탐방로는 나뭇가지에 걸려있는 흰색 리본이 안내한다. 하늘을 가린 숲길의 초입에 소원을 빌며 세운 돌탑을 지난다. 나뭇잎 틈을 비집고 내려오는 빛에서 온기가 느껴질 정도로 숲길은 짙고 서늘하다.
돌탑을 지난 길은 짙은 피톤치드를 내뿜는 삼나무길을 거치며 괭이모루오름을 한 바퀴 돈다. 이 길은 당오름옆으로 이어지고 마을 길의 하이라이트인 본향당에 이른다.
기와를 얹은 건물 뒤편으로 돌로 만든 당집이 있다. 그 옆 팽나무의 긴가지가 늘어져 당집 위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모습이 신령스럽다. 조금전 어느 기도객이 다녀갔는지 당집 앞엔 촛불이 켜져 있었고 사과와 배등 소박한 제물이 올려져 있었다.
신당 앞 길가의 동백나무들은 소원나무다. 마을에서 제공한 소지에 소원을 적어 매다는 나무들이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게임카드를 많이 얻게 해달라는 어린 아이의 소망에서부터 승진을 기원하고 둘째를 얻게 해달라는 나름의 간절한 바람들이 매달려 있다. 소지의 내용 중 가장 많은 건 가족의 행복. 그만큼 간절하면서도, 또 이루기 쉽지 않은 소망이 아닐까 싶다.
마을에서 벗어난 길은 이제 파란 제주의 하늘 아래 오름으로 향한다.
송당 탐방길이 지나는 오름은 마을의 18개 오름 중 안돌오름과 밧돌오름 2곳이다. 이 두 오름의 큰 특징은나무가 많지 않다는 것. 제주 전역 대부분의 오름은 나무가 우거진 산림지대다. 하지만 60, 70년 전 제주의 오름들은 그냥 민둥산이었다. 정부의 조림정책에 따라 민둥 오름이 그새 숲이 돼버린 것이다.
이 두 오름은 남들이 ‘예스’할 때 ‘노’를 한 덕에 오름의 능선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본연의 모습을 간직하고있었다. 여전히 이 오름에선 방목된소가 한가로이 풀을 뜯어먹고 있다.
안돌오름과 밧돌오름이 가장 눈부실 때는 이른 아침 해가 뜰 무렵이다. 뒤로는 한라산이, 앞으로는 망망대해가 내려다 보이는 풍광 속 오름의 출렁이는 능선을 스크린 삼아 시시각각 펼쳐지는 빛의 스펙트럼이 장관이다. 또 이때는 생명의 움직임이 가장 부산한 마법의 시간이기도하다. 오름의 능선을 오르는 길, 수풀에서 노루가 튀어나와 깜짝 놀랐다.
오름의 민둥 능선에는 무릇꽃이 군락을 지어 핑크빛 수를 놓고 있다. 이제 막 솟구친 태양의 조명을 받은 꽃은 보석보다 찬란하게 반짝였다.
제주= <이성원 기자> sungwon@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