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왕의 숲이 내뿜는 정기… 나만을 위한 휴식

2015-09-04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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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가까이서 숲의 향기 접할 수 있는 생태 관찰로

▶ 1927년부터 오대산 월정사 전나무 종자 증식 시작

『경기 포천 광릉 국립수목원』

절정의 여름휴가도 끝자락이다.

계곡과 바다, 물놀이공원 등 유명 여행지마다 넘쳐나는 인파로 몸살을 앓았다. 밀리는 도로, 붐비는 관광지에서 사람들에 치이다 보면 여행은 일종의 의무고 휴가는 노동의 연장이기 십상이다. 단 하루라도 번잡하지 않은 곳에서 조용히 쉴 수 있는 곳은 없을까? 서울에서 가까운 국립수목원은 전쟁 같은 여름휴가의 피로를 조금이나마 덜 수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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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삑~삑~삑~” 익숙하지 않은 휴대전화 경보음이 요란하다. 수도권에 첫 폭염특보가 내렸고 가급적 야외활동을 자제하라는 메시지가 함께 떴다. 6일 오전 10시 국립수목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걱정이 됐지만 왕의 숲이 뿜어내는 기운을 믿어보기로 했다.

국립수목원은 조선 제7대 왕 세조와 정희 왕후가 묻힌 광릉의 부속림으로 500년 넘게 왕실림(王室林)으로 관리해 왔다. 1999년 국립수목원으로 명칭이 바뀌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광릉수목원으로 더 익숙하다.

2010년에는 생물 다양성을 인정받아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으로 지정됐다. 수목뿐 아니라 동물과 곤충균류 등의 단위 면적당 생물서식 밀도가 국내에서 단연 으뜸이다.

얼마 전에는 희귀 곤충인 초록하늘소가 29년 만에 발견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국립수목원의 최대 장점은 하루 입장 인원을 5,000명으로 제한한다는 것이다. 숲 생태에 무리가 가지 않는 환경 수용성 평가를 거쳐 확정한 인원이다. 1,120헥타르, 여의도보다 6배 넓은 면적에 이 정도 인원이면 사람이 가장 많은 시간에도 그리 붐비지 않는다.

수목원을 찾은 날은 관람객이 연중 가장 많이 몰리는 시기였지만 여러 갈래로 뻗은 산책길은 어느 곳이나 여유가 넘쳤다.


오솔길도 많고, 테마별 소규모 정원도 다양하지만 수목원은 크게 두 구역으로 나뉜다. 정문으로 들어서서 왼편은 울창한 큰 숲이고, 오른쪽은 아기자기한 전시실과 초본류 정원이다. 모두 돌아보려면 3~4시간은 족히 걸리지만 의무감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다. 어느 길로 들어서도 그늘이 넉넉하고, 여유롭게 앉아 쉴 수 있는 벤치도 곳곳에 있다. 아름드리 활엽수가 짙은 그늘을 드리운 왼쪽 길로 먼저 들어섰다. 차량 두 대는 너끈히 비켜갈 만한 넓은 산책로는 참나무와 서어나무 등이 하늘을 가려 한낮인데도 어둑하다.

넓은 흙 길이 심심하면 ‘숲 생태관찰로’ (Eco-Trail)로 들어선다. 460m통나무 산책길이다. 태풍으로 스러진 나무도 통행에 방해가 되지 않을 만큼만 치워놓아 가장 가까이서 숲의 향기를 접할 수 있는 길이다. 관찰로를 빠져나오면 인공 저수지 육림호를 만난다. 비단잉어 노니는 잔잔한 수면에 비친 울창한 숲이 그대로 왕의 정원이다.

그리 넓지 않은 호수 주변은 호젓하게 산책을 즐기기에 그만이다.

육림호를 한 바퀴 돌아 나오면 하늘로 쭉쭉 뻗은 전나무 숲길이 이어진다. 오대산 월정사의 전나무 종자를 증식해 1927년부터 조림을 시작했으니 수령이 80년이 넘었다. 나무 크기는 당연히 월정사에 미치지 못하지만 숲의 풍모는 한 수 위다.

200m가량 이어진 전나무 숲에는 다른 활엽수와 키 작은 나무들도 골고루 섞여 한 낮에도 간간이 스며드는 햇빛이 신비감을 자아낸다.

여기서 조금 가파른 산길을 오르면 동물원이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겠다. 백두산호랑이, 반달가슴곰, 늑대, 고라니 등 12종의 포유류와 조류를 보유하고 있지만 일반 동물원처럼 개체수가 많지 않다. 특히 중국에서 1쌍을 기증받은 백두산호랑이는 1마리밖에 남지 않아 보기에 안쓰러울 지경이다.

동물원에서 곧장 내려오면 열대식물원이다. 연구가 주 목적이기 때문에 온실규모는 크지 않지만 흔히 볼 수 없는 2,700여종의 열대와 아열대 식물을 보유하고 있다. 매시 정각 해설사와 동행해 20여분간 관람할 수 있다. 이곳부터 산림박물관을 중심으로 덩굴식물원, 관상수원, 비밀의 뜰, 백합원, 무궁화원 등 아기자기한 정원들이 잇닿아 있다.

봄꽃은 지고 가을꽃은 이른 계절이라 풍성하지는 않지만, 한반도에만 자라는 특산식물 400여종을 심어 놓은 희귀 특산식물 보존원에서는 수수하고도 앙증맞은 야생화를 볼 수있다. 해오라비난초, 좁은잎해란초, 한라개승마, 자주꽃방망이, 금꿩의 다리,금불초, 돌마타리 정도가 지금 볼 수있는 꽃이다. 짙은 녹색 숲에서 빨간자태를 뽐내는 나리와 범부채, 동자꽃도 반갑다.

역대 대통령의 기념식수를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다. 반송과 금강소나무주목 분비나무 등 대부분 침엽상록수를 선택했다. 박정희와 전두환 전 대통령의 기념식수는 육림호 부근에, 다른 대통령의 기념식수는 산림박물관 주변에 위치해 있다. 정치 지향은 달랐어도 숲을 가꾸는 의지만은 하나였음을 확인할 수 있어 반갑다.

수생식물원과 덩굴식물원을 돌아나오는 것으로 국립수목원 산책이 끝났다. 폭염경보 속에서도 거의 4시간을 걸었다.

전국을 달군 무더위의 기세도 왕의 숲이 내뿜는 신선한 기운과 넉넉한 그늘에 한 풀 꺾인 느낌이다.


■국립수목원 ‘소나무의 광복을 선언합니다’ 특별전

애국가에 등장하는 민족의 상징 소나무의 영어 이름은 지금까지는 ‘재패니즈 레드 파인’(Japanese red pine)으로 불렸다. 심지어 국립수목원을 대표하는 광릉요강꽃도 ‘재패니즈 레이디즈 슬리퍼’(Japanese lady’s sleeper)다. 울릉도에 자생하는 섬벚나무에는 다케시마라는 이름이 버젓이 포함돼 있고, 국민정서가 짙게 밴 찔레꽃도 ‘재패니즈 로즈’(Japanese rose)로 쓴다.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들이 이름 붙였거나, 일본을 방문한 외국 학자들에 의해 명명된 결과다.

국립수목원 산림박물관은 15일까지 ‘소나무의 광복을 선언합니다’ 특별전을 열고 있다. 산림청이 광복 70주년을 맞아 진행하는 ‘식물주권 바로잡기’ 일환이다. 산림청은 한반도에 자생하는 4,173종의 식물 중 2,500종은 영어 이름을 바꾸고, 330종은 한글발음을 명사화한 영어 이름을 새로만들었다.

일본 고유식물로 오해할 수 있는 ‘재피니즈’는 ‘코리안’이나 ‘오리엔탈’ 등으로 바꾸고, 한반도에만 자생하는 식물엔 울릉도 단양 등을 넣어 서식지를 명확히 밝혔다.

그러나 이는 나라마다 다르게 부를 수 있는 일반 이름에만 국한된다.

국제식물명명규약에 따라 최초 등록한 이름만 쓰는 학명은 고칠 수 없다는 한계는 여전하다. 울릉도에만 자생하는 섬초롱꽃(Campanula takesimana Nakai)의 학명에도 다케시마가 들어가 있지만,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학자 나카이가 처음 발견해 학명을 붙였기 때문에 손댈 수 없는 처지다. 식물주권 바로잡기의 자세한 내용은 국립수목원 홈페이지(www.kna.go.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여행메모

▶국립수목원은 일요일과 월요일에 쉰다. 토요일은 3,500명, 평일은 5,000명으로 입장 인원을 제한한다. 홈페이지에서 인터넷 예약이 필수다. 입장료는 성인 기준 1,000원. 수목원에는 10명의 숲해설사가 활동하고 있다. 입구 방문자센터에서 신청하면 된다.

▶수목원은 서울시청 기준 약 40km거리다. 의정부에서 포천으로 가는 43번 국도 축석고개삼거리와 남양주 진접읍 부평교를 연결하는 ‘광릉수목원로’ 중간지점이다. 방문객이 몰리는 시간엔 주차장이 부족하다. 대중교통은 의정부역에서 경복대학을 오가는 21번 버스가 15~3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수목원에는 육림호 휴게소에서 간단한 음료를 판매하는 것 외에 매점이 없다. 도시락을 싸오면 휴게광장에서 먹을 수 있다. 과일은 미리 잘라서 도시락에 넣어오는게 상식이다. 씨앗은 생태계를 교란할 수 있고, 껍질은 멧돼지를 부른다. 곤충채집도 당연히 불허다.

▶숲의 본래 주인인 세조의 광릉은 수목원 정문에서 진접 방향으로 약 700m 아래에 있다. 주차장에서 묘지까지 500m 숲길은 수목원 못지않게 울창하고 한적하다.


<최흥수 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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