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주저함 없이 (노유미 / 번역가)

2015-03-23 (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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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지인이 긴 여행길에 올랐다. 몇 달 전 결혼한 그는 아내와 함께 장장 1년여의 여행을 계획했고 이윽고 실행에 옮겼다.

평소 크게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건 아니라고 말하곤 했던 그는 결혼 전부터도 종종 기약 없는 긴 여행을 즐겨왔다. 걱정하는 주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하루 10마일을 채 벗어나지 못하는 생활반경에 갇혀 사는 그들을 되레 위로하곤 했다.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처음엔 미국으로 그 이후엔 지구본을 펴 안 가본 곳을 헤아릴 정도의 여행광이 된 그. 그가 전하는 여행기는 언제나 새롭고 흥미진진했다.


하지만 결혼 후 채 1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의 그의 새로운 여행 계획 소식이 조금씩 퍼져나가기 시작하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제 결혼까지 한 그가 그렇게 긴 여행을 할 수 있겠냐”며 의구심을 표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에게는 결혼 계획과 함께 가진 새 직장이 있었고, 그의 배우자 역시 오랜 시간 다니던 일터가 있었다. 과연 그들은 새롭지만 짧은 경험을 위해 소위 ‘안정적’인 무언가를 포기할 수 있을까. 결코 적지 않은 나이에 감행하는 ‘불안정’으로의 회귀... 그들은 과연 해낼 수 있을까.

더구나 이제 한 가정의 가장이 된 그의 여행엔 이전보다 더한 무게와 책임이 더해질 테니, 현재 그의 상황에서의 여행이 지난날과 같을 리는 없어보였다.

계획단계에서부터 난 그들의 성공을 바랬다. 대리만족이라면 맞을까. 아마도 그들을 통해 많은 일에 일단 주저하기 바빴던 내 자신이 이제껏 하지 못했던 도전이 실제 실행 가능한 것일 수도 있다는 확인을 받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무언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일에 몰두하며 사는 삶은, 물론 그 가치가 범사회적 동의를 얻을 수 있는 일이라면, 많은 이들에게 칭송을 받는다. 그만큼 신념이나 꿈보다 우리는 생계와 같이 필요에 따른 삶에 매몰되어 살 때가 훨씬 많다.

급한 일보다는 중요한 일에 집중하려면 생각보다 큰 용기와 결단 그리고 희생이 필요하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대부분 그날그날 닥친 일들을 처리하는 쪽을 어쩔 수 없이 택하게 된다. 그렇게 하루 이틀이 가다보면, 날마다 무언가에 쫓겨 사는 듯한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

개인적으로 중대한 결정을 앞두고 있다. 이런 나의 고민을 잘 아는 한 친구로부터 최근 ‘인생을 너무 겁내지 말자’는 따뜻한 격려메시지를 전해 들었다.


그 순간 마침내 깨달았던 것 같다. 현재 닥친 상황에서 줄곧 느껴온 답답함과 막막함이 실은 ‘겁’이었단 걸 말이다. 누군가에게는 즐겁고 설레며 기대되는 모험 같은 일이 될 수도 있을 무언가를 앞두고 고작 취해온 행동이 겁내는 것이었다니. 적지 않은 실망감이 몰려들었지만, 동시에 작은 해방감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처방의 절반이 정확한 진단에서 시작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까. 닥친 현실에 대한 스스로의 태도를 알아낸 이상, 이제 작게나마 어떤 변화들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계획하는 일에 게으른 편은 아니지만, 지금의 삶이 있기까지 ‘우연’‘발견’ 같은 즉흥적인 요소들의 도움이 있었다는 건 인정해야겠다. 흔히들 이런 것들이 있어 우리의 삶이 더욱 다채로워진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수동적인 간섭에만 기대기에는 아무래도 인생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어떠한 희생이 요구될지는 모르겠지만 용기 있는 모험을 선택한 자에게 허락될 것은 무엇일지, 그 알싸함을 적어도 한번쯤은 맛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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