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포로 로마노… 아피아 가도… 2,000년 전 유적서‘현대’를 보다

2015-01-02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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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리석 건물 위용 포로 로마노, ‘견제와 균형’ 민주주의 상징으로

▶ 콜러시엄 검투사 경기 이용해 노예 억압… 인술라선 서민 고단한 삶

[영원의 제국, 로마]

‘아는 만큼 보인다’는 여행의 격언에 대해 이탈리아 로마만큼 잘 들어맞는 곳도 많지 않다. 로마 시내에는 무려 2,000여년 전의 유적이 발길에 걷어차일 만큼 많다. 하나하나가 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꾼 스토리를 담고 있다. 하지만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알기 힘들다. 방송가나 출판시장에는 에세이류의 여행기만 넘칠 뿐 실제 이탈리아 문화와 역사에 대한 인식은 깊지가않다. 로마가 중요한 것은 그들이 인류에게 해준 역할 때문이다. 한국인에게도 마찬가지다. 특히 올해는 한국과 이탈리아가 수교 130주년을 맞은 해였다. 로마제국은 도시국가로 시작했다. 이 때문에 나중에 제국을 만들었어도 그냥‘ 로마’로 불렸다. 이탈리아라는 말은 상대적으로 뒤에 나왔는데 알프스 남쪽과 지중해에 둘러싸인 ‘본국’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였다. 이후 기나긴 중세를 지나서 19세기 말 이탈리아가 재통일되면서 공식 국가명칭으로 확정됐다. 로마라는 도시의 역사는 2,800년 가까이 된다. 현존하는 한 국가의 수도급 대도시 중에서 가장 길다. 이 중 고대 로마제국의 역사가 1,200여년이다. 로마제국은 기원 전 753년에 로물루스라는 사람이 건국해 서기 453년 이민족에게 망할때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1,000년간 존속(기원 전 57년~서기 935년)한 신라보다 길다. 물론 신라와의 차이는 그것뿐만은 아니다. 유럽과 아시아·아프리카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한 만큼 다양한 다양한 제도를 만들었다.


▧ ‘견제와 균형’이란 공화정 개념을 세운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로마 한복판에 ‘포로 로마노’라는 곳이 있다. 대리석 건물 유적과 돌기둥 사이로 세계각지에서 몰려온 관광객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닌다. 2,000년 전에 이런 건축물을 세울 수 있었던 고대 로마인들의 기술에 감탄을 하면서다.

가장 중요한 것은 포로 로마노라는 곳 자체다. 일종의 광장이다. 2,000년 전의 사람들이 이런 광장에서 모여 정치를 하고 경제를 하고 토론을 했다는 것이 놀랍다. 정치는 광장에서 이뤄진다는 유럽 전통을 세운 것은 바로 로마다. 그럼 누가 이런 전통을 시작했을까.

로마도 기원 전 753년에 시작할 때는 국왕이 정치하는 왕정국가였다.

하지만 폭군들의 압제를 거치고 나서기원 전 509년에는 공화정으로 바뀐다. 왕이라는 제도를 없애고 시민들이 직접 정치를 하겠다는 것이다. 물론 누군가 시민들을 이끌 대표는 있어야 한다.

왕정의 마지막 국왕인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를 타도하고 공화정의 기치를 든 사람은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라는 사람이다. 그는 기존 왕정 아래서는 이름뿐이었던 원로원과 민회에 확실한 실권을 준다. 그리고 왕 대신에 집정관이라는 직책을 만든다. 이로써 ‘집정관 원로원 민회’라는 3개의 권력추가 정립(鼎立)하는 체제가 시작된다. 집정관은 행정·군사 권한을 갖는 지금으로 말하면 대통령이다. 임기는 1년. 원로원은 지금의 의회다. 의회와의 차이는 주로 귀족 출신이고 종신제라는 것이다. 시민들로 구성된 민회는 일종의 국민투표가 된다. 집정관은 원로원의 추천을 받아 민회에서 선출한다. 사법은 원로원 의원이 검사와 판사 역할을 했으니 원로원의 권한에 속했다. 국왕 1인의 독재에서 집정관·원로원·민회로 권력이 분리된 것이다. 즉 행정과 입법·사법의 견제와 균형이다.

사실상 이러한 제도는 2,500년이 지난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로마가 ‘영원의 제국’으로 인식되는 이유다. 이 시스템은 로마에서 유럽을 거쳐 미국에서 정착한다. 조선왕조가 퇴장하고 민주공화국의 이념을 택한 후 우리나라도 이를 받아들였고 또 지금 그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고대 로마제국에는 장점만 있을까.


물론 아니다. 약점도 많다. ‘로마인이야기 1~15권’의 걸작을 쓴 시오노나나미는 ‘대일본제국’의 후손답게 로마제국에 대한 극찬으로 시종하지만 의도적으로 빼놓은 것도 있다.

로마제국, 정확히는 고대사회 전체가 노예제 사회였다. 학자들 간에 차이가 있지만 대략 본국 이탈리아만을 기준으로 해도 전체 인구의 30~40%가 노예였다고 한다. 자유민 중에서도 시민(남자)은 더 적었고 다시 상층에는 귀족이 있었다. 즉 분명한 계급사회였던 것이다.

이것이 콜러시엄이 세워지고 검투사 경기가 인기를 끈 이유다. 검투사 경기에서 패자 모두가 살해된 것은 아니라지만 경기는 잔인했고 많은 사람이 비명에 갔다. 고대 로마의 찬란한 문화와 콜러시엄의 잔인함을 서로 연결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고대제국들이 피지배 계급을 억눌러야했던 저간의 사정을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것이다.

대부분 노예로 구성된 검투사들이 콜러시엄에서 죽어갈 때 이는 잠재적인 반란성향의 다른 노예들에게 경고가 됐을 것이다. 반항하면 이렇게 된다는 식이다. 로마 역사상 가장 유명한 노예반란인 ‘스파르타쿠스 반란’이 기원 전 71년 진압되고 노예 반란자 6,000여명이 아피아 가도를 따라 수㎞나 목이 매달렸다고 하는데 노예주이기도 한 로마시민들은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로마시민들의 생활이라고 해서 그렇게 좋았던 것은 아니다. 현재 고대로마의 유적 가운데 남아 있는 것은 대부분 신전이나 궁전·공공 건축물이 대부분이고 로마 서민들이 살고있던 주택은 거의 없다.

현재 로마 시내 베네치아 광장의 한 귀퉁이에 ‘인술라’ 유적이 있다. 인술라는 ‘섬’이라는 뜻인데 지금으로 보면 다세대 주택을 말한다. 베네치아 광장 인근의 유적은 원래 6층 규모고 400명이 산 것으로 추측되지만 현재 4층까지 일부만 남아 있다.

재미있는 것은 아무리 조사해 봐도 건물에 화장실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수도도 없다. 주민들은 시내의 공동화장실이나 공동수도를 이용했다. 중세 유럽에서 길에 오물투척이 빈번해서 이를 피하기 위해 나온 것이 하이힐이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로마 시대부터 시작됐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여러 가구가 비좁은 공간에서 살았고 물론 난방도 안 됐다.

로마가 기원 전후로 인구 100만명의 대도시였다고 하는데 이를 수용하기위해 이런 벌집 같은 주택이 지어졌을 것이다. 화려한 로마의 뒷면이다.


<로마 - 최수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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