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용암들을 움켜 쥔 환상의 숲 보셨나요?

2014-11-21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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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의 또 다른 별천지 ‘곶자왈’

같은 제주 땅에서도 어떤 마을에선 ‘곶’이라 하고, 또 다른 지역에서는 ‘자왈’이라 불렀다. ‘산 숲’ 혹은 ‘잡목과 가시덤불이 있는 숲’을 이르는 제주 방언이다. 그러던 것이 2000년 제주 지질에 관한 한 논문에서 두 단어를 합쳐 ‘곶자왈’이라고 공식적으로 처음 표기했다. 이후 ‘곶자왈’은 10여년 만에 단박에 제주를 대표하는 일반명사의 위치에 올랐다.

학술용어를 제주방언으로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곳의 지질구조와 식생이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특이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곶자왈, 그것은 지명이 아니라 지형을 이르는 말이다. 한때는 한라산 자체만으로도 제주는 훌륭한 관광지였다. 근래에는 올레길이 대세지만, 이제 제주의 속살을 제대로 보고자 하는 사람들은 곶자왈을 꼭 여정에 포함시킨다.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환상의 숲우와~, 흔히 글로 표현하기 힘든 풍경을 만날 때는 감탄사로 대신한다. 그리고 언어로 부족한 부분은 사진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충한다. 곶자왈은 그 둘을 다 동원해도 제대로 표현할 재주가 없었음을 고백해야겠다.


제주어 사전에는 곶자왈을 ‘나무와 덩굴 따위가 마구 엉클어져 어수선하게 된 곳’이고, 곶자왈 생태체험 교육자료에는 ‘용암이 크고 작은 암괴로 쪼개지면서 요철지형을 이루며 쌓인 곳’이라 설명하고 있다. 거칠게 정의하면 곶자왈은 바위 덩어리 위에 형성된 숲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것도 넓은 암석지대에 바위 사이로 뿌리를 내린 풀과 나무가 만들어 낸 환상적인 숲이다. 바위는 두께가 20m가 넘는 것에서부터 사람 머리만한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한라산을 중심으로 남북은 경사가 급해 하천이 발달하고, 동서 지역은 경사가 완만해 곶자왈이 많이 남아 있다. 돌무더기이기 때문에 이용이 불편한 것도 긴 세월 동안 잘 보존된 이유 중 하나다. 소규모 농사와 방목, 숯 채취 정도는 있었지만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곶자왈의 기반인 암괴지형을 훼손할 정도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제주시 조천읍 교래리에 위치한 교래 곶자왈은 그 중에서도 규모가 가장 크고 온대와 난대 식생이 섞여 있어 생물 다양성이 풍부한 곳이다. 입구인 교래 자연휴양림에서부터 도로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숲이 펼쳐진다. 입구에서부터 하늘을 덮은 원시림이다. 구멍 난 돌로 경계를 지은 산책로를 제외하면 녹색이끼를 뒤집어 쓴 크고 작은 바위가 온통 숲을 뒤덮고 있다. 고사리와 관중 등 양치식물이 바위틈을 메워 초록 덮개를 만들고, 송악과 줄사철나무 등 덩굴식물이 나무줄기를 타고 올라 신비로움을 더한다.

곶자왈의 풍경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은 역시 바위를 움켜쥐고 숲을 형성한 나무들이다. 땅속에 있는 나무뿌리를 이곳에선 쉽게 관찰할 수 있다. 틈새를 파고든 모든 나무뿌리가 바위모양을 따라 살아 움직이듯 흘러내린다. 척박한 환경에 적응하려는 듯 이곳에서는 한 줄기로 쭉쭉 뻗은 나무를 보기 힘들다. 바닥에서부터 여러 갈래로 가지가 벌어졌다. 땅속 깊이 파고들지 못하고 뿌리째 뽑혀 쓰러진 나무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흙바닥인 양 터무니없이 덩치를 키운 나무들은 욕심을 낸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한 눈에 내려다보는 중산간 평원물기 머금은 바위 이끼 위로는 천천히 달팽이가 기어 다니고, 보일 듯 말듯 높은 나무 가지에선 오색딱따구리가 먹이를 찾고 있다.

큰지그리오름까지 이어지는 산책로는 편백나무 인공조림을 만나기까지 약 2km 구간 내내 환상적인 숲길이다. 그 사이 움집과 숯가마 잣성(목장의 경계를 하기 위한 돌담) 등 곶자왈에 의지해 생계를 꾸렸던 흔적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편백나무 숲길을 통과하면 그제야 조금 가파른 오르막이고 이내 큰지그리오름 전망대에 닿는다. 중산간 지대에 넓은 평원을 형성하고 있는 교래 곶자왈과 아래쪽 오름이 한눈에 들어온다.

숲 속을 걸을 땐 온통 초록일 것 같았는데 의외로 울긋불긋하다. 높은 곳에서 한눈에 내려다보는 고원의 단풍은 제주의 또 다른 풍경이다.


다른 곶자왈이 해발 200~400m인데 비해 이곳은 400~600m 지대에 위치해 낙엽활엽수가 많기 때문이다.

큰지그리오름으로 가는 산책길은 곶자왈이 끝나는 지점부터 편백나무 숲길이 이어진다.

큰지그리오름 전망대에서 본 교래 곶자왈 평원에 발갛게 단풍이 오르고 있다. 교래 곶자왈은 해발 400m가 넘는 중산간 평원으로 난대와 온대식생이 공존한다. 낙엽활엽수가 많아 다른 곶자왈에 비해 단풍이 화려하다.

대규모 개발위험에 처한 곶자왈을 보호하기 위해 설립한 단체가 ‘곶자왈 공유화재단’이다. 2007년 ‘곶자왈 한평사기운동’으로 시작한 이후 내셔널트러스트 운동으로는 드물게 36억원을 모아 지금까지 약 48만㎡(14만5,000평)의 곶자왈을 사들였다. 민·관과 기업까지 곶자왈의 생태적 중요성을 공감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시작 당시 3.3㎡당 1만원에 불과하던 땅값이 지금은 7~10만원까지 올라 아직도 사유지로 많이 남아 있는 곶자왈의 추가 매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안미영 공유화재단 사무국장은 “곶자왈은 자체로도 훌륭한 생태자원이지만 한라산과 해안을 잇는 제주의 생태 축”이라며 더 많은 개인과 기업·단체가 곶자왈 보존에 함께해 달라고 당부했다.

가을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불규칙하게 떨어지는 하산 길의 곶자왈은 더욱 어둑어둑해져 신령스럽기까지 하다. 그 감동을 제대로 표현할 재간이 없었다는 불찰은 백문이불여일견(百聞이不如一見)이라는 상투어로 대신할 수밖에 없다. 편견의 위험을 무릅쓰고 제주 여행객을 두 부류로 나눈다면 곶자왈을 본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분류할 수도 있으리라.


#여행 수첩

●교래 곶자왈은 내비게이션에 나오지 않는다. 교래 자연휴양림을 찍고 가면 쉽다. 입장료는 1,000원.

●교래 곶자왈은 큰지그리오름까지 오르는 산책로와 생태탐방 코스로 구분돼 있다. 왕복 3시간 정도의 산책 겸 등산이 부담스럽다면 1시간30분 정도 산책할 수 있는 생태탐방로를 이용하면 된다.

●곶자왈의 본 모습은 여름이 제격일 것 같지만, 전문가들은 겨울을 추천한다. 초록 덮개에 하얀 눈이 쌓이면 신비로움이 더하고 암괴지형의 특성이 더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교래 곶자왈은 낙엽활엽수가 많아 단풍을 볼 수 있는 게 장점이다. 한 겨울에도 초록색 숲이 그립다면 상록활엽수가 많은 동백동산을 추천한다. 람사르 습지에 등재된 곳이기도 하다.

●곶자왈에서 산책로를 벗어나면 위험하다. 하천도 없고 기준이 될 만한 지형지물이 없어 길을 잃기 쉽다.

●휴양림 바로 옆의 돌문화공원도 추천할 만하다. 제주도 탄생신화인 설문대할망 설화를 모티프로 꾸민 공원이다. 주변경관을 해치지 않게 지하에 건설한 박물관은 화산과 용암이 만들어낸 제주 지형의 특성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전시했다. 돌에 얽힌 야외 전시물도 재미를 더한다.

입장료는 5,000원(청소년 2,800원)


<최흥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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