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세계 각지서 온 순례객들과 어울려 걷다

2014-01-31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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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인 정찬열의 산티아고 순례길 2,000리 ⑧ 나헤라-산토도밍고 데 라 칼자다

▶ 일본에서 남아공에서 프랑스에서 아픈 다리 달래며 묵묵히 목적지 향해 “누구든 산티아고에 닿으면 그가 승자”

세계 각지서 온 순례객들과 어울려 걷다

치마를 입고 걷는 아주머니. 사람 살아가는 모습이 가지각색이다.

세계 각지서 온 순례객들과 어울려 걷다

가르마처럼 난 길을 따라 순례자들이 걷고 있다. 무릎이 아프면 내리막길을 뒷걸음으로 가면 통증을 덜 느낀다고 한다.

▲여덟 번째 이야기(5월5일)

- 나헤라(Najera)에서 산토도밍고 데 라칼자다(Santo Domingode la Calzada)까지 - 21k

순례길 9일째다. 아침 7시10분 출발. 작은 산을 넘으니 끝없이 넘실대는 밀밭과 군데군데 노랗게 핀 유채 밭이 한 눈에 펼쳐진다. 그 사이로 가르마처럼 난 길을 따라 순례자가 배낭을 지고 걸어간다. 아침 해가 떠오르자 멀리 눈 덮인 산이 이마를 드러낸다. 절경이다. 절경은 형용을 불허한다.


앞에 걸어가는 순례객의 배낭에 작은 배너가 펄럭인다. ‘Camino de Santiego en Japan’이라는 글씨가 보이고, 일본어로 뭐라 적혀 있다. 이 길에서 일본인은 처음 만난다. 요코하마에 살고 있다는 모도꼬 할머니다. 은퇴한지 오래됐는데 혼자서 왔다고 한다. 며칠 전에 불가리아 여학생 둘이 자기 나라 국기를 달고 가는 건 귀엽게 보였는데, 70이 넘은 할머니가 ‘일본을 나타내며’ 걷는 모습은 좀 거시기하다. 일본에도 유명한 순례길이 있다면서 시코쿠 순례길을 소개한다. 1,400km란다. 한국의 올레길도 알고 있다면서 언젠가 기회가 되면 한 번 가보고 싶다고 한다.

한 순례객이 다가오더니 셔츠를 흔들면서 “혹시 네 것이 아니냐”며 묻는다. 오던 길에 주웠다고 한다. South Africa에서 왔다면서 이름이 헤르민이라고 한다. 만델라를 아느냐고 묻기에 잘 안다고 대답했더니 환하게 웃는다. 나도 노벨 평화상을 받은 김대중 전 대통령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세계 도처에서 온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며 걷는다.

달팽이가 신작로를 건너고 있다. 마른 황토 길을 기어가는 달팽이가 힘들어 보여서, 무엇보다 사람들의 발길에 밟힐까 싶어 집어서 풀 속으로 던져주었다. 그런데 2km쯤 걸어가다 신작로에서 달팽이 껍질을 발견했다. 아까 풀숲으로 던져준 달팽이가 생각났다. 그 녀석도 순례자가 아니었을까. 껍질로 남아 있는 이 녀석은 순례길 도중 목이 말라 죽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걷다가 길을 지나는 달팽이를 또 발견했지만 순례길을 방해하는 성 싶어 그냥 두었다.

치마를 입고 가방을 끌고 가는 아주머니가 보인다. 어떻게 저런 차림으로 이 길을 걸어갈 생각을 했을까. 함께 걷는 분은 남편인 모양인데 그는 제대로 준비를 갖추었다. 프랑스에서 왔다고 한다. 사람 살아가는 모습이 가지각색이다.

골프장이 보인다. Ciruena 마을을 지나면서 길가 아이를 보듬고 있는 아주머니에게 눈 덮인 산의 이름을 물었다. 산 로렌토 마운틴이라고 한다. 연필을 달라고 하더니 스펠링을 적어준다. 모처럼 영어가 통하는 주민을 만났다.

저만치 앞서 걷는 아내가 뒷걸음으로 언덕을 내려가고 있다. 며칠 전부터 아프기 시작한 무릎이 아직도 낫지 않아 힘들어한다. 무릎이 좋지 않으면 언덕길을 내려갈 때 저렇게 뒷걸음을 치면 통증을 덜 느낀다고 했다. 매일 오르막 내리막길을 걸어야 하기 때문에 물집이 잡히는 건 다반사이고 무릎이 고장 나거나 관절이 아파서 쉬었다 걷는 사람들이 많다. 함께 출발했던 한국 대학생 중에서도 발 때문에 우리보다 뒤쳐져 걸어오는 아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발님을 살살 달래가며 무리하지 않게 걸어야 한다.

가파른 고개를 올라가는데 자전거 선수들이 지나가기 시작한다. 울퉁불퉁한 자갈길을 산악자전거를 몰아 씩씩거리며 달려가는 선수들의 등짝에 커다란 번호판이 붙어 있다. 선수가 많은 걸 보니 꽤 큰 대회인 모양이다.


언덕을 넘으니 도시가 멀리 보인다. 오늘의 목적지 산토도밍고다. 뾰쪽하게 솟아 있는 성당의 종탑이 멀리서도 뚜렷하게 보인다.

도시 입구에 알베르게가 하나 보이는데 정문에 만들어 세운 상징물이 재미있다. 축구공 위에 닭이 올라서서 목청 높이 우는 모습이다. 이 나라 사람들이 축구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 도시가 닭으로 유명한 지역인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거리에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경찰이 거리를 통제하고 있다. 자전거 선수들이 간격을 두고 달려 들어오고 있다. 1시30분 알베르게 도착. 새로 지은 건물이다. 숙소나 화장실은 물론 부엌시설도 훌륭하다. 함성소리가 들린다. 창 너머로 광장이 보인다. 자전거 대회 시상식을 하는지 쩌렁쩌렁한 마이크 소리와 관중들의 환호성이 들려온다. 행사장인 칼사다 광장이 멀지 않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일요일이다. 일요일은 마켓이 문을 열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지만 혹시 순례자를 위해 문을 연 곳이 있을까 싶어 마켓도 찾아볼 겸 시내 구경을 나섰다. 노천카페에 순례자들이 앉아 맥주 한 잔을 앞에 놓고 목을 축이고 있다.

칼자다 광장으로 갔다. 잔치는 끝나고 몇 사람이 골인지점에 설치된 고무풍선으로 만든 개선문을 철거하고 있다. 취재를 마친 TV 방송국 중계차가 행사장을 빠져 나간다. 휴지조각 이 바람에 나뒹굴고 있다. 선수를 환영하던 관중들의 환호성도 자취를 감추었다. 그 많던 사람은 다 어디로 갔을까.

광장을 나와 숙소를 향해 한참을 걸어가는데,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린다. 아니, 자전거 선수가 아닌가! 마지막 선수가 자전거를 몰아 들어오고 있다. 쓰러질 듯 쓰러질 듯 혼신의 힘을 다해 달려오고 있다. 오가는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박수를 보낸다. 나도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선수는 있는 힘을 다해 휘청휘청 자전거를 몰아간다. 행사 진행차가 사이렌 소리를 울리며 그 뒤를 따라간다. 행사진행 트럭에 선수 두 명이 앉아 있다. 자전거에 문제가 생겼거나 몸이 아파 자동차를 타고 오는 모양이다. 차에 있는 선수들이 앞서 가는 선수를 바라본다. 동료선수를 바라보는 눈에 안쓰러움과 부러움이 함께 들어 있다.

몇 킬로를 달려 왔을까. 기진맥진 비틀거리며 골인지점을 향해 자전거를 몰고 가는 선수의 뒷모습이 골목을 돌아 사라졌다. 선수를 맞이하는 환호성은 커녕 개선문마저 철거해 버린, 텅 빈 광장을 향해 그는 달려갔다.

일등선수가 골인한 지 두세 시간이 지난 지금, 무슨 사연이 있었기에 이제야 도착했을까. 땀범벅이 되어 숨을 헐떡거리며 달려가던 꼴찌선수의 얼굴이, 포기하지 않고 끝내 결승점을 향해 당당히 돌진해 가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숙소에 돌아와 순례자들에게 꼴찌선수 얘기를 했다. 무릎이 고장 나 이틀째 알베르게에서 쉬고 있다는 영국인 순례자가 말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누가 먼저 가는가를 겨루는 곳이 아니지요, 각자의 힘에 맞게 걸어서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누구나 승자가 되는 길이지요. 우리 인생도 그렇지 않을까요. 내 길을 내가 걸어가는 겁니다. 그 선수처럼 포기하지 않고 결승점에 도착하면 결국 이기는 자가 되는 거지요.”

산토도밍고를 생각하면 꼴찌선수가 떠오른다. 손바닥이 아프도록 갈채를 보내던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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