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험한 오솔길 지나 언덕 오르니 온통 금작화…

2013-12-06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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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인 정찬열의 산티아고 순례길 2,000리 ④ 쭈비리에서 팜플로나까지

▶ 공중에서 붙어버린 팜플리나의 가로수 눈길, 훈제 돼지 하몽 한 점에 와인 한잔 ‘찰떡궁합’

험한 오솔길 지나 언덕 오르니 온통 금작화…

배낭을 허리에 매어 끌고 가는 여인, 이 길을 저렇게도 걸을 수 있는가 보다.

험한 오솔길 지나 언덕 오르니 온통 금작화…

농부가 갓 태어난 새끼 말을 돌보고 있다. 말은 낳은 후 30분이면 걷는다고 했다.

▲4월29일(월) 팜플로나(Pamplona)까지 20km 걷다
새벽이 나를 깨웠다. 배낭을 둘러멘다. 무겁다. 울타리 너머로 던져버리면 딱 좋겠다고 중얼거리다가 마음을 고쳐먹는다. 배가 풍랑에 뒤집어지지 않도록 밑짐을 싣듯이, 배낭은 길을 걷는 자에게 밑짐이 아닐까. 물살 빠른 강을 맨몸으로는 건널 수 없어도 짐을 지면 거뜬히 건너가지 않던가 라고 생각하자 배낭이 훨씬 가볍다. 인간이 이렇게 간사스럽다.


아침 햇살이 산등성이를 비춘다. 순례자들이 띄엄띄엄 걷고 있다. 마르지 않은 옷가지나 양말을 배낭에 걸어 말리면서 가는 사람도 보인다.

노란 꽃이 온 산을 덮었다. 금작화다. 봄이면 우리 산천에 진달래 피어나듯 이 땅은 금작화가 만발한다. 색깔만 다를 뿐 크기나 생김새가 진달래와 많이 닮았다. 심심산천에 진달래가 지천이듯 이골 저골 온통 금작화다.


우리 시인들이 진달래를 노래한 것처럼, 이곳 시인들은 금작화를 노래했다. 열여섯 살에 빛나는 시편을 써서 천재시인으로 불렸던 랭보는 ‘어린 시절’이란 시에서, “…솔길은 험하다 / 언덕은 금작화로 덮여 있다 / 바람도 없다 / 새들과 샘은 얼마나 멀리 있는가!…”라고 읊었다.

자전거를 탄 젊은이 대여섯 명이 지나간다. 이 순례길이 끝나면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증서를 발행해 준다. 걸어 온 사람, 자전거를 타고 온 사람, 그리고 말을 타고 온 사람. 세 종류의 사람들에게 산티아고 길을 걸었다는 확인 증서를 준다고 했다.

울타리 너머로 말 목장이 보인다. 농부가 갓 태어난 새끼 말을 돌보고 있다. 말은 낳은 후 30분이면 걷는다. 인간은 1년이 걸린다. 갓 태어난 원숭이 새끼도 어미 원숭이의 털을 붙들고 혼자서 젖을 먹는다. 그러나 인간은 어떤가. 혼자 일어서고, 스스로 완전하게 걸을 수 있을 때까지 도대체 몇 년이라는 세월이 걸리는가. 그 기간에 자식을 위해 헌신하는 분이 누구신가. 어머니. 소리 없이 내려 밤새 가만가만 대지에 스며들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내는 분. 새벽하늘을 흠뻑 적시고도 해 뜨면 흔적도 없이 몸을 감추는 한 방울 이슬 같은 존재. 어머니는 그런 분이 아닐까.

목장 넘어 양떼들이 나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다. 손을 흔들어주었더니 ‘흠메에 흠메에’ 말을 걸어온다. 멀리서 오신 손님을 환영한다는 의미렸다. 다시 손을 흔들었더니 ‘흠메에에~~’ 길게 대답해 준다. 저들은 저들의 언어로 얘기를 하고, 나는 나의 언어로 말을 한다. 각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제각기의 언어로 말을 걸어오듯, 말이 통하지 않으면 웃음이나 표정으로 생각을 표현하며 소통하듯, 인간과 양떼 사이도 이렇게 소리와 몸짓을 통해 교감하는 것이다.

동물뿐이겠는가. 저렇게 바람이 불 때마다 이파리를 흔들어 환영해 주는 나무들은 또 어떤가. 이 우주에 존재하는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각자의 생각을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하여 서로 소통하며 살아가는 게 아닐까.

오솔길은 험하다. 언덕은 금작화로 덮여 있다. 바람도 없다. 랭보가 노래했던 바로 그 언덕을 나이든 부부가 손을 잡고 다정히 걸어가고 있다. 몇 살쯤이나 될까. “깎아 만든 저 나무 닭이 울거든/ 그제야 임은 늙으소서”라고 읊었던 고려 때 사람 우탁의 시처럼, 그렇게 금실이 좋아 보이는 부부다.

푸르다. 산이 푸르고 들판이 푸르고, 푸른 산천을 걸어가는 사람들도 푸르다. 공중을 나는 새들도 푸르다.


푸른 숲 속으로 난 길을 따라 빨간 배낭을 끌고 가는 사람이 보인다. 배낭을 짊어지지 않고 수레에 매어 끌고 가는 저 여인. 아하, 이 길을 저렇게도 갈 수가 있는 모양이다. 조심조심 언덕을 내려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내가 더 조심스럽고 애가 탄다.

산모퉁이를 돌자 마을이 나오고, 강 하나를 건너자 동네가 보인다. 그리고 다시 야트막한 언덕을 넘자 도시가 나타난다. 팜플로나(Pamplona)다.

팜플로나는 스페인의 17개 자치주 중 하나인 나바라주의 주도(州都)다. 인구 20만 정도인 이 도시는 ‘산페르민’ 축제로 유명하다. 매년 7월6일부터 일주일간 열리는데 축제의 백미는 ‘엔시에로’(Encierro)라 불리는 소몰이 행사다. 행사기간 매일 아침 8시에 투우경기에 쓰일 소들을 사육장에서 풀어놓으면 팜플로나의 시가지 골목길 825m를 사람들과 함께 달려서 투우장에 골인한다. 1924년 이래 15명이 죽고 200여명이 부상당했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위험천만한 행사다. 올해 행사에서도 두 명이 사망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축제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 ‘태양은 다시 뜬다’에 ‘엔시에로’가 소개된 후부터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고, 지금은 행사기간 백만명 이상의 관광객이 몰리는 세계적인 축제가 되었다.

시내를 걸어가는데 가로수가 독특하다. 플라타너스 나무가 길 양쪽으로 심어져 있는데, 나무들이 공중에서 서로 붙어버렸다. 신기하다. 공중의 나뭇가지를 접붙이기했는지 모르겠다. 꽤 긴 구간 그런 모습의 가로수가 계속된다.

무너진 돌담 일부를 시멘트 블락으로 보수해 놓았다. 이끼 낀 고풍스러운 돌담 허물어진 사이를 회색 시멘트 블락으로 보수해 놓았다. 영 어울리지가 않는다. 비단 옷에 무명 헝겊을 덧대어 기워 놓은 형상이다. 돌담이니 돌을 쌓아 보수를 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1시45분, 시립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성당을 개조해 순례자 숙소로 만들었다고 한다. 3층 석조건물이다. 1782년 개축했다고 돌에 새겨져 있다. 천장이 높고 웅장하고 화려하다. 114명 수용 가능한 곳인데 숙소는 물론, 화장실이며 부엌 등, 시설이 잘 되어 있다.

어제 만났던 한국 청년들을 모두 만났다. 각자 걸어오지만 물이 웅덩이로 모이듯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된다. 장을 봐다가 한국 음식을 함께 만들어 먹기로 했다.

시내로 나와 식품점을 찾아갔다. 고기 집에 돼지 뒷다리가 주르르 걸려 있다. ‘하몽’이라고 한다. 스페인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고기다. 통째로 걸려 있는 고기를 필요한 만큼 칼로 잘라서 팔고 있다. 도토리가 많은 고산지대에서 돼지를 길러 특별한 가공방식으로 만들어낸 고기다. 짭조름하고 씹히는 맛이 좋다. 역사적으로 바다와 가깝게 지냈던 사람들이라 오랫동안 바다에서 생활하는 뱃사람들이 고기를 먹을 수 있도록 개발된 저장방식이라고 했다. 와인 한 잔을 곁들이니, 하몽과 와인이 찰떡궁합이다걸어가면서 그 지역의 특별한 음식을 먹는 것은 빼놓을 수 없는 여행의 재미다. 하몽 한 덩어리, 스페인산 와인, 쌀을 비롯하여 바구니 가득 장을 봤다. 부엌에서 지지고, 볶고, 끊이고, 삶아서 한 상 가득 차려놓았다.

스페인산 와인 맛이 일품이다. 잔을 들고 건배를 한다. “번집시다”. 10년 전쯤 중국 연변을 방문했을 때 조선족 친구들이 했던 건배사다. 술잔과 술잔으로 번지고, 마음과 마음으로 번져가자는 뜻이라 했다. 다 함께 술잔을 높이 들었다. “번집시다” 스페인 팜플로나에 한국 사람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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