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그래비티, 111년전 달세계여행에 견줄만한 영상혁명

2013-10-19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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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밖 세계, 우주에 대한 호기심은 인류 시작부터 존재해왔다. 영화 태동기 가장 먼저 등장한 영상 중 하나도 우주여행에 관한 것이다. 1902년 프랑스 감독 조르주 멜리에스(1862~1983)가 만든 ‘달세계 여행’은 최초의 SF영화로 기록된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길이였지만, 채 20분이 못 되는 이 영화는 국제적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

2013년 멕시코 출신 알폰소 쿠아론(52) 감독의 신작 ‘그래비티’(Gravity·중력)를 보며 111년 전 인류가 처음 SF영화를 접한 경이를 떠올렸다. 17일 개봉한 이 영화는 3D 아이맥스가 지닌 생생한 간접체험 효과를 극대화한 진보된 영상을 보여주며, 픽션을 논픽션의 경지로 끌어올린다. 전에 겪어보지 못한 생생한 사실감은 웬만한 판타지 영화의 시각미를 단숨에 눌러버릴 정도의 위력이다. 우주공간 소재 영화의 신기원이 될 것 같다.

3D대작 SF영화의 새 장을 연 것으로 평가받는 ‘아바타’(2009)의 제임스 캐머런(59) 감독이 “지금까지 만들어진 우주 영상 중 최고이고, 지금까지 만들어진 우주영화 중 최고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내가 그토록 오랫동안 보기를 갈구했던 바로 그 영화”라고 격찬을 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가 이 영화에 3D자문으로 간여한 것을 감안해도 그렇다. 이미 동료 감독들과 온갖 해외매체들의 극찬이 나올만큼 나왔으니 여기에 더해 섣불리 이런저런 상찬의 말을 늘어놓는 것은 진부할 것 같다.


줄거리는 아주 단순하다. 허블천체망원경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처녀우주비행에 나선 의료공학박사 라이언 스톤(샌드라 불럭)과 베테랑 우주비행사인 지휘관 맷 코왈스키(조지 클루니)는 러시아가 폭파한 스파이위성의 잔해들에 의해 왕복선 익스플로러가 파괴되며 우주공간을 맴돌게 된다.

지구상공 600㎞ 대기권의 아름다운 ‘블루마블’ 지구가 내려다보이는 곳, 하지만 기온은 125~-100도를 오르내리고 소리도, 기압도, 산소도 없어 특수 우주복 없이는 생존이 절대 불가능하다. 보유 산소가 소진돼가는 상황, 이들은 지구로 돌아가기 위한 필사의 계획을 세운다. 일단 러시아의 우주정거장까지 이동해 망가진 소유즈 호를 타고 중국의 우주정거장까지 이동, 거기서 선조우 호를 타고 지구로 귀환하기로 한다. 일견 불가능해 보이는 구상이나 이런 상황에 처한 우주인이라면 기적적인 생존기를 쓰지 말란 법도 없다. 어이없는 설정에 기막혀질 때 상상, 몽상같은 영화적 트릭을 적절히 사용한 것도 재치있다.

흔히 공상과학이라고 불리는 SF장르지만 기술문명의 발달로 우주왕복선이 오가고 우주유영이 가능해진 현재, 이는 진정 현실적인 재난으로 다가온다. 미국항공우주국(NASA) 소속 과학자 도널드 J 케슬러가 1978년 제기한 ‘케슬러 신드롬’, 즉 수명이 다해 파괴된 인공위성들의 파편들이 우주쓰레기가 돼 연쇄충돌위험을 일으킬 것을 경고했는데 이는 실제가 됐다.

쿠아론은 드라마에 강한 감독이다. 감성적인 면을 건드리기는 하지만 현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기술적 발전을 한껏 즐기기 위해서는 자막보다는 전체 스크린에 집중할 것을 권한다. ‘볼거리 구경’이라는 측면에서 영화가 처음 발명된 시기의 속성에 보다 다가가는 영화다.

우주비행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던 쿠아론 감독은 자신이 감독뿐 아니라 공동 각본·제작·편집을 맡은 이 영화에서 1억 달러의 제작비를 투입해 ‘카메라를 우주로 들고 가서 찍은 것처럼’ 만들자는 목표를 실현했다. 정교한 CG애니메이션 기술, 카메라, 조명 워크는 물론 12개의 와이어로 이뤄진 장치 등 특수장치를 고안하고 정육면체의 세트에 수십만개의 LED램프를 사용하는 ‘라이트박스’를 창안하는 등 기존 제작기기의 한계를 넘어선 시도로 사실감 넘치는 화면을 만들어냈다. NASA로부터 제공받은 자료를 바탕으로 캐릭터가 지구 위 어디에 있는지, 낮과 밤, 일출과 일몰 등 다양한 환경들을 고려해 등장인물의 위치와 움직임을 계산해냈다.

미국을 비롯한 여러나라 개봉 후 과학적 오류에 대한 각종 지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주비행 체험을 해본 이가 몇 안 되기에 이 같은 잘못은 리얼리티에 별 지장을 주지 않는다. 1969년 닐 암스트롱에 이어 인류 두번째로 달 표면을 밟은 우주비행사 버즈 올드린(83)이 “실제와 다소 차이가 있지만 역학 시뮬레이션이 훌륭했고 무중력 상태의 사실적 묘사에 엄청난 감동을 받았다”는 요지의 감상문을 ‘할리우드 리포터’지에 실으며 세계적 흥행에 청신호를 켰다.

다만 인간이 달에 가기도 전, 지금과 같은 디지털 기술이 없던 시절 발표돼 당시 놀라운 상상력과 영상미로 충격을 안겨줬던 스탠리 큐브릭(1928~2009) 감독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가 지닌 웅장한 철학성에는 미치지 못했다는 평이다. 하지만 한 끗 차이인 삶과 죽음의 경계와 비의(秘意), 탯줄, 자궁, 태아, 탄생 등을 연상시키는 이미지로 생명의 모태로서 어머니 지구가 가진 상징적 의미를 곳곳에서 잘 끌어냈다.


가늠할 수 없이 광활한 검고 깊은 우주공간에서 인간은 한낱 먼지보다 작은 존재다. 극중 우주인들은 무중력상태에서 둥둥 떠다니며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빙글빙글 도는데, 실존을 압도하는 우주의 검고 깊은 무한성, 우주보다 무겁다는 관념적 표현을 하긴 하나 한 인간이 가지는 실질적 존재의 사소성이 거대한 공포감으로 다가온다. 제작진은 ‘탄력 컷’이라 이름 붙인 롱테이크로 등장인물이 겪는 상황을 관객 자신의 것처럼 느끼도록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경치가 들어오는 넓은 앵글에서 시작해 샌드라 불럭의 얼굴을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잡은 후, 그녀가 쓴 헬멧 속으로 들어가 그녀의 시점을 보여준 다음 다시 멀리서 바라보는 앵글로 옮기는 촬영기법이다.

죽음은 의외로 쉽게 다가오지만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삶을 갈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스톤 역의 샌드라 불럭(49)은 진지한 공학박사이자 초보우주인,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땅에 묻고 온 어머니의 모습을 오가며, 삶에의 의지를 공감 가도록 보여준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탄탄한 몸매도 놀랍지만 경륜다운 진솔한 연기력이 왜 젊은 여배우들을 제치고 그녀가 선택됐는지를 보여준다.

코왈스키 역의 조지 클루니(52)는 영웅적 면모를 보여주면서도 한 시도 유머를 잃지 않는 캐릭터를 특유의 유쾌한 매력으로 잘 표현해냈다. 다소 들떠있는 듯하지만 이미 목숨을 담보로 한 우주선 탑승을 오랫동안 해오며 삶과 죽음을 초월한 인물이다. 우주공간에서 지구를 내려다보는 직접체험을 할 수 있는 것은 극소수의 선택받은 자의 권한이다. 그는 마지막까지 시시각각 변화하는 지구가 만들어내는 장관에 감탄하고 매 순간순간을 즐기는 여유를 보여주며 자기희생을 선택하는 멋진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김태은 문화전문기자> tekim@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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