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LA의 시작, 1781년 <2>

2013-08-23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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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잔 김의 길따라 말따라

한편 그 해 4월에 캘리포니아 주지사 네베는 새로 도착하는 농부들을 맞이하기 위해서 당시 주도인 몬트레이로부터 로스앤젤레스 인근의San Gabrie미션에 와 있었다. 그는 LosAngeles 지역을 돌아보고 강을 낀 농장지역을 돌아본 후, 정착을 위한 모든 세부사항을 착착 진행하고 있었다.

정착민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동안 주지사 네베는 그가 선택한 엘에이 평지의 인근에 사는 이앙가 인디언 마을도 방문하였다. 많은 선물로그들로부터 환심을 사는 한편, 그들을교회로 초대하여 자연스럽게 세례를받을 수 있도록 유도하기도 했으며 처녀 총각의 결혼식도 주선하여 그들을혼배성사의 축복을 해주며 환심을 사는데 공을 드렸다.

1781년 7월8일, 마침내 첫 번째 그룹인 44명의 농부들이 San Gabriel 미션에 도착을 하였다. 그들 중 일부가천연두를 앓고 있다는 판정을 받는바람에 격리 수용되는 신세가 되기도했지만 많은 우여곡절 끝에 지금의로스앤젤레스 강을 낀 목적지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당시의 주지사였던 네버의 기록에 따르면 로스앤젤레스의 공식적인 발기일은 1781년 9월4일로 44명의 이주민들이 2명의 신부와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12년 전Crespi신부가 최초로 로스앤젤레스라는 이름을 지었던 바로 그 지역에 도착하였던 것이다.

이주자들은 그들이 바라본 로스앤젤레스의 첫 인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을 남겼다.

“우리가 도착한 지역인 Los Angeles는커다란 참나무와 버드나무 숲으로 우거져 있었으며 Los Angeles강에는 푸른 물이 흘러 강 주위에는 사슴과 너구리 그리고 곰 같은 동물들의서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강에는 연어와 송어 떼가 헤엄치며 우리를 환영하여 주었다.”최초의 44명으로 시작된 로스앤젤레스 마을이 생겨난 이후에 1년이 지나면서 최초의 이주가구는 8가구로줄어들기도 했지만 곧바로 군인 가족과 새로운 이주자들이 정착하였다. 이듬해인 1782년에 정착민들은 로스앤젤레스 강의 물줄기를 마을의 중앙으로 끌어들인 수로시설을 건설하여 농사를 짓기 시작하였는데 그들의 첫번째 농작물은 포도농사였다.

풍요로운 농장이 건설되고 수많은가축들이 사육되고 양초공장과 가죽공장이 생겨나면서부터는 인근 지역의 가브리엘리뇨 인디언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는데 멀리는 샌디에고나샌 루이스 오비스포에서도 소문을 듣고 와 부족한 노동력을 채우기도 하였다.

당시의 농부들은 노동자 인디언들에게 식량이나 의류 혹은 다른 유럽상품으로 인건비를 대신하여 지불했다고 한다. 그 후, 3년이 지난 1784 년,마을 광장에 최초로 성당이 세워졌는데 29채의 어도비(진흙을 발라 말린벽돌) 가옥이 광장 주변에 새로 지어지자 제법 마을다운 모습이 갖추어지기 시작했다.

그 후, 샌디에고와 샌루이스 오비스포 미션이 인디언 부족의 공격을 받았던 때에도 피난민들이 LA로 몰려들어 난민 캠프가 조성되면서 LA의인구 증가에 한몫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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