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영·러 진출에 스페인 미션 건설 박차

2013-06-28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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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잔 김의 길따라 말따라

영국과 러시아가 태평양 연안을 탐험하면서 북미 대륙에 손을 뻗치기 시작하자 스페인은 재빨리 캘리포니아의식민지 건설에 착수하기 시작하였던것이다. 30마일마다 미션을 만든다는가정 하에 말타고 하루거리 지점 혹은걸어서 사흘거리의 지점을 미션지역으로 책정하여 샌디에고 부터 샌프란시스코의 소노마까지 El Camino Real의탐험로에는 23채의 성당이 건설되었으며(1781년 화재로 2채가 손실되어 현재는 21채가 남아 있다)그 중, San Diego 미션과 San Antonio,San Buenaventura, San CarlosBorromeo, San Francisco de Assisi,San Gabriel, San Juan Capistrano, SanLuis Obispo, 그리고 Santa Clara등의9채는 세라 신부의 손으로 지어졌고그의 후임 신부인 프란시스코 라수엔신부에 의해 8채가 지어졌으며 나머지 4채의 성당은 그 이후에 지어졌다.

캘리포니아 미션지역의 Playero‘쁠라예로; 해안가의 인디언들’들은 점차적으로 카톨릭 중심적인 삶으로 바뀌기 시작했으며 내륙 지역의 Serrano‘세라노; 산맥지역의 인디언’들은 그럭저럭 그들 전통의 삶을 그대로 유지해 나갈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이들을 관리, 감독하고 나아가서는 캘리포니아 해안을 넘나드는 러시아와 영국 국적 선박들의 경계 및 방어 수단을 목적으로 스페인 군대는 샌디에고요새와 샌타바바라 요새, 몬테레이 요새, 샌프란시스코 요새의 4개 요새를건설하였으며 또한, 이 요새에 주둔중인 군대에 군량미를 조달할 목적으로샌호세 농장과 로스엔젤레스 농장을건설하였는데 로스엔젤레스 농장은샌디에고와 샌타바바라 요새의 군량을 담당했고 샌호세 농장은 몬테레이와 샌프란시스코 요새에 군량을 담당하였다.

한편, 캘리포니아 미션의 선두 주자였던 uJnipero Serra신부는 1782년, 카멜 성당 건물을 완성하였는데 같은해Serra 신부의 오랜 벗이며 엘 카미노레알 탐험에서 모든 기록을 담당했던Juan Crespi 신부 ‘로스앤젤레스라는이름을 최초로 만든 신부’가 숨을 거두자 친구를 잃은 슬픔에 세라 신부는한동안 깊은 시름에 빠지기도 했었다.


그 후, 1783년에 Serra신부는 캘리포니아 전 미션 지역을 돌아다니며미국의 독립 전쟁을 위한 기금을 마련하였는데 그는 어려운 환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37달러 기금을 마련하여 George Washington 장군에게 전달하였는데 그로 인해 세라 신부는George Washington장군으로부터 캘리포니아의 시조라는 칭호를 받았으며또한, 그의 이러한 활동 기록은 훗날멕시코 시절 파괴되고 방치되었던 캘리포니아의 최초의 미션들이 미국의정부 시절에는 대부분 복원되는 기쁨을 맞이하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이듬해인 1784년, 주니페라 세라 신부는 캘리포니아를 위해 평생을 바친 후, 그의 나이 71세를 끝으로 8월28일, Mission Carmel의 그의 사무실에서 생을 마감하였는데 그의 시신은Mission San Carlos Borromeo 묘지에안착되었다. 그가 마지막 눈을 감을때 그의 제자인 Francisco Palou에게건축중인 카멜 석조 건물이 완성되면꼭 자신의 시신을 이전 시켜달라고유언하였으므로 1797년, 석조 건물이완성되자 Francisco Palou 신부는 유언대로 주니페로 세라 신부의 시신을이장하였다. 그 후, 1803년 FranciscoPalou 신부도 운명이 다하자 JuniperoSerra 신부와 Juan Crespi신부 옆에 나란히 묻히게 되어 캘리포니아의 최초미션을 주도했던신부들의 운명은이처럼 마감되었다.

John Kim의Spanish Cla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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